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
공감의 부작용
눈치가 빠르고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성격 탓에
나는 타인들의 환심을 사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다.
적절한 조언이나 해답을 딱 내주는 말주변은 없어도
타인의 기분을 흡족하게 할 만한 리액션에는 타고났다.
언제나 타인에게 좋은 사람, 인정받는 사람이고 싶어서
솔직함을 택하기보다 공감하는 쪽을 택했다.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공감은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극심한 부작용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나의 무기력증의 절반 정도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무능함에 있었지만
절반 정도는 관계에서 오는 무기력감이었다.
만나는 이에 따라 대화의 주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 대화의 주제는 크게 두 부류였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관계로 인한 이야기.
자신의 처해진 상황이나 미래에 대한 막연함에 대해 이야기가 주된 고민인 친구와의 대화는
대게 큰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잠시 잠깐은 열심히 살고 싶다는 작은 의지의 불씨를 지펴주기도 했다.
하지만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는 대다수의 친구들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타인에 대한 이야기가 대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대화는 저절로 의도했던 의도치 않던 그 타인에 대한 험담으로 이어지게 된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친구에게 나는 격한 리액션으로 공감을 해주곤 했다.
그렇게 그 친구와 헤어지고 나면 마음 한편은 찝찝함으로만 남게 된다.
결국 나도 그 잘못된 공감을 통해서 똑같이 험담을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감을 통해 친구의 감정에 적잖게 이입을 해 버리고 만다.
나도 그 사람이 미워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 친구의 어려운 관계가 해결이 되어버렸을 때이다.
그때 부작용과 심각한 무기력함이 찾아온다.
분명히 같이 험담을 했는데 그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어 이제는 괜찮다고 말한다.
내가 지나치게 이입했던 나쁜 감정은 해소가 되지 않았는데 결국 그 지나친 공감 때문에 나는 두 사람을 전부 잃게 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부정적인 공감은 공감을 해주느니만 못하다.
분명히 호되게 데이는 날이 오고 만다.
내게 남은 것이 1도 없을 때
내 인생 모토는 ‘잘 돼서 남 주자’ 일 정도로 주변인들에게
퍼주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며 살아왔다.
아니, 다시 말하면 인생의 절반 이상은 인정받기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는 우스갯소리로 내 물건을 가리키며 “어머, 저거 예쁘다”라고 말 한마디만 하면
다 준다고 말할 정도로 나는 내 것을 아낌없이 주는 편이다.
순수하게 그게 좋아서라기보다는 환심을 사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
스스로가 만든 무기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내가 더 이상 내 것을 퍼줄 수 없게 되었다.
신랑이 자신의 명의를 시아버님께 빌려드렸는데 그게 발단이 되어
결혼 후 첫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온 죄 밖에 없는데
우리 두 사람은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우리가 가진 값비싼 물건을 하나, 둘 씩 팔기 시작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으며 살아온 우리가
외식을 할 때 가격부터 계산하게 되었고 얻어먹는 것보다 사주는 게 익숙했던 우리 부부였기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더 이상 나눌 수도 베풀 수도 없게 되었다.
관계의 변화는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변하기 마련인데
정말 확연하게 드러났다.
더 이상 나에게 나올 것이 없기 시작하자 하나둘씩 나에게 멀어지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슬픔이 누군가에게는 확실한 약점이 되었던 것이다.
때로는 약점을 넘어서 나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
내게 남은 것이 1도 없을 때.
그때 진짜와 가짜가 구분이 된다.
그때 나에게 남은 진짜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 존재만으로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믿어준 사람들이었다.
그 순간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별개로
떠난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상실감을 떨쳐내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잠시 잠깐 가을의 단풍처럼 머물러 준 것일 뿐
금세 바닥에 떨어진 낙엽이 되어 바람과 함께 멀리멀리 날아가 버릴 것들이었다.
잃은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부정은 확신 긍정은 의심
자존감이 낮은 편이라서 그런지 특히나 나에 대한 부정적인 말에는 확신을 하는 편이고
긍정적인 말에는 의심을 하는 편이다.
나는 사람을 곧 잘 믿는 편임과 동시에 의심이 많은 편이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건가?’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반면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구나.’에 대해서는 단번에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내가 싫은데 좋은 척을 하는 것도
드러나는 표정에서 나에 대한 미운 감정도
긍정적인 감정에는 둔한 편인데 부정적인 감정에는 상당히 예민한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유독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정을 쏟는다.
이미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음에도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더 다가가고 잘하려고 노력할수록 받는 거절 감은
자꾸만 스스로를 상처 받게 하고 실족하게 만들었다.
부정적인 반응에 얽매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긍정적인 반응에는 확신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십 대 학창 시절에는 좋든 싫든 무조건 어떠한 무리 속에 반드시 소속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이십 대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서른이 되고 나니 얼마 남지 않은 좁은 인간관계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버리는
나는 여전히 관계의 노예였다.
서른이 되면 더 이상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눈치는 눈치 없이 더 빨라져서 타인의 감정의 변화를 더 잘 읽게 되어버렸다.
그냥 몰랐으면 더 좋았을 눈치다.
정답이 필요한 건 아닌데
나는 해답을 주는 것보다 공감을 해 주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는 편이다.
상대방에게 인생의 해답을 건넨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대다수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어느 정도 정답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답에 확신이 필요할 뿐 아닐까?
나 역시 그랬다.
위로가 필요했지 조언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 때도 있고
따뜻한 말 한마디면 족했지 상대방에게 정답을 요구했던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공감이면 충분했다.
한 친구는 나에게 꽤나 자주 정답을 주곤 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곧 잘 진단도 내주었다.
때로는 그게 독이 되어 나에 대해 단정 짓는 순간도 잦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어느 순간에는 굉장히 좋은 사람이 되었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굉장히 지질한 사람이 되어있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조언을 해 주면서 자주 정답을 내밀곤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의 정답이 오답인 순간일 때도 있었다.
그가 말한 정답을 내가 오답으로 받아들일 때면
그는 꽤나 자주 “내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라고 말을 했고
가끔은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으로 치부당하기도 했다.
나를 쉽게 단정 짓는 사람.
그의 말 한마디로 인해 정의가 내려져 버리는 나 자신.
나는 매 순간 정답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위로가 필요했고 공감이 필요했던 것이다.
기쁜 일에 기뻐해 줄 수 있는 친구
약 5년의 시간. 길고 긴 암흑기를 보냈다.
갑자기 기울어져 버린 집안 사정에 난생처음으로
카드사의 독촉 전화를 받게 되었고 추심원들의 추심을 받게 되었다.
신용회복이라는 넘지 못할 큰 산 앞에서 우리 부부는 꽤나 많이 무기력해져 있었다.
우편함에 봉투만 들어 있어도 가슴이 출렁하고 내려앉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렇게 신랑과 길고 긴 암흑 속에서 꾸역꾸역 버티며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랑의 회사에 희소식이 연달아 터졌다.
상황이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고 낡고 남루한 투룸 빌라에서
평수를 조금 넓혀 아기자기한 단지가 있는 아파트형 쓰리룸 빌라로 이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미래가 보이는 건 확실해졌다.
믿을 수 없는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떵떵거리며 살 정도는 아니지만 걱정을 덜고 살 정도가 되었다.
인간관계는 두 번 정도 크게 걸러지는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한 번,
기쁜 일이 생겼을 때 한 번 이렇게 걸러졌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보다 기쁜 일이 생겼을 때 걸러지는 관계가
훨씬 더 가혹하고 아팠다.
내가 정말 힘들었을 때 남아 준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이 답도 없는 상황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이 기쁜 소식을 전했을 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던 그들의 모습에 상실감이 정말 컸다.
내가 힘들었을 때 건네준 위로는 진심이었을까?
혹시 내가 계속 이대로 불행에 머물길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에 굉장히 씁쓸해졌었다.
그래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던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나도 이들의 기쁨에 꼭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한 날이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은 문제아다?
교회에서 만난 나와 신랑은 결혼을 하고 청년의 소속을 떠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집과 가까운 인근의 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워낙에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라 새로 정착한 곳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권유로 고민 끝에 교회 봉사를 해 보기로 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려면 아무래도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리며 사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봉사활동이 나의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무려 1년이 넘는 시간을 앓고 말았다.
교회 봉사는 실력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짧은 생각이 문제였고
사람을 사귀고 나면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가 수월하겠다는 생각도 문제였던 것 같다.
요즘은 교회는 마음만큼이나 실력까지 겸비한 능력자들이 많고
사람에게 기대하면 가장 먼저 돌아오는 건 상처와 상실감이다.
부족한 나의 실력에 공동체 사람들에게 적잖은 스트레스를 주게 되었고
그 자리는 원래 다른 실력자가 오기로 했던 자리인데 실력도 없는 내가 무턱대고 오게 되어 상당히 난처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보는 눈이 많은데 그에 비해 내 실력에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를 직접 듣고 나니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부끄럽고 창피했고 수치스러웠다.
몇 주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간 잠적을 해 버리니 이 사실을 알고 여러 담당자분들께서 찾아와서 위로해주고 다독여주었지만 한 번 상심한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더 이상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원래 다니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며 안심을 시킨 뒤 1년 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적잖은 충격의 사건이 된 그 이후
나는 꽤나 긴 시간 칩거생활을 했다.
교회가 집 근처에 있으니 혹시라도 길가다가 마주칠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상처 받은 사람이기 이전에 마치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분명히 꽤나 큰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상처 준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에게 나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일 것이다.
똘똘 뭉친 공동체 안에 실력도 없는 뻔뻔한 사람이 들어왔다 나갔으니
나는 분명 그들 사이에서 오히려 앓던 이가 빠져나간 격이었을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을 기피하게 되었다.
어중간하게 인사만 나누는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치는 것도 꽤나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에 대한 기억을 다 지워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 속에 없었던 존재가 되고 싶었다.
기존의 관계에 까지 극심한 영향을 끼쳤다.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과 동시에 극심한 무기력감이 찾아왔다.
사람 자체에 진저리가 나기 시작했다.
잠시 잠깐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마 나는 그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받았다.
내가 나간 뒤에도 나에 대한 어떠한 평가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는 일지만
서로 잘 아는 그들 틈에서 이방인인 나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일까?
나는 분명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못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세상은, 크고 작은 사회는 상처 받은 사람을 몰아세운다.
자기가 제대로 못해 놓고 상처 받았다고 말한다.
상처 받은 사람이 마치 나약해 빠져서 별 것도 아닌 일에 꽁해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상처 준 사람들은 모른다.
그 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부작용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야 하는지.
상처 받은 사람이 나약해서가 아니다.
상처 받은 사람을 문제아로 만드는 게 문제다.
어중간하게 인사하는 사람들
교회 봉사 사건 이후 가장 큰 부작용은 바로 어중간하게 인사하는 사람들을 기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 틈에 어색하게 쭈뼛 거리는 것도 불편하고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해 굉장히 많이 신경을 쓰게 됐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는 피하게 되고
어중간하게 인사하는 사람들과는 억지로 눈을 피해서 못 본 척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서른 이후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해보려고 노력을 해 본 적이 있었지만
각기 다른 가치관으로 서로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는 일이 빈번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에 있어서 많이 주저하게 되었다.
그렇게 잠시 잠깐 알아가다가 그친 어중간하게 인사하는 사람들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을 피하게 되었다.
어쩌다 피하지 못해 인사를 건네게 될 경우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간 그 사람의 표정과 말투를 곱씹으며 괜히 찝찝하기까지 했다.
내가 저 사람하고 가까워지지 못했던 이유 중에
혹시 내가 저 사람에게 실수한 적이 있었던가?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뇌리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런 형상이 생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피하게 되는 사람들이 바로 어중간하게 인사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의 소리는 결국 자격지심 투성이인 내가 만들어 낸 소리일 것이다.
왜 사람들은 나를 이토록 아프게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