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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표름달 Nov 17. 2019

나는 사소하지만 쓸모 있는 존재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한참 무기력함과 자괴감에 빠져있을 때.

스스로 극복 해 낼 힘이 없다는 판단을 한 뒤,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상담은 지금 나의 현재 상태로부터 시작되지 않았고,

무수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타임머신을 탄 든 거슬러 올라간 출발지점은 엄마와의 관계 었다.

어찌 보면 나는 나 자신보다 엄마를 더 사랑해왔다.

그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엄마이지만, 

어딘지부터 모르는 순간부터 엄마에 대한 커다란 응어리가 자리를 잡아 좀처럼 그 근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그런 감정들은 고이 묻어둔 채 엄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엄마와 다툼이 한 번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는 이유 모를 감정들이 뒤엉켜 나를 힘들게 했다.


상담사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원하는 게 뭐예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라던지..."


엄마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수 없이 해왔다.


"그동안 상처 준 게 있다면 엄마가 미안해."


순간 욱 하는 감정에 엄마는 "엄마가 미안해"라는 말을 일삼아왔다.

결국 내가 엄마에게 원하는 건 미안하다는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없었을 때.

그 고민 때문에 머리가 아팠을 때 즈음,

난생처음으로 엄마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엄마에게 상처 받았던 일들을 다 쏟아내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낼 생각이었다.


엄마와 삼시 세 끼를 먹고,

삼일 내내 엄마와 같이 잠을 자고,

하루 종일 엄마와 시간을 보내면서 엄마에게 쏟아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을 지경이었다.

그때 즈음, 내가 엄마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만 깨닫고 말았다.

그렇기에 더 이상 쏟아 낼 말도, 받아 낼 사과도 없음을 깨달았다.

어릴 적 어려운 형편 탓에 어린 동생을 둘이나 나에게 맡기고 직장 생활을 했던 엄마.

사춘기 시절에는 이민을 결정한 가족들을 대신해 일 년간 먼저 홀로 보내진 타지 생활

대학을 졸업하고 첫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나 홀로 돌아온 한국 행.

결국 내가 정말 엄마가 필요했던 시기에 엄마가 옆에 있어주지 못했던 게 내내 마음의 상처였던 것이었다.

나이 서른이 되도록 엄마가 채워주지 못했던 그 시절이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남아 지금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것이었다.


여행 내내 엄마와 보낸 고작 3박 4일의 시간을 통해 결핍되어있던 감정들을 전부 채울 수 있었다.

이유 모를 상처는 결코 없다.

내가 왜 상처를 받았을까?를 먼저 고민한 뒤

내가 그 상처로 인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을 수도 있다.

찾아내는 순간도 생각지도 못했던 단순한 순간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상처 앞에서 직면해야 할 건

내 마음에게 끊임없이 묻는 것이다.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뭐야?"라고.


오름에 오르다


무기력증이 극에 치달았던 연말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독한 겨울이었다.

그때의 소원이 있었다면 “부디 내일이 오지 않게 해 주세요.”였을 만큼 심각했다.

그런 나에게 신랑은 단 둘이서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길 제안했다.


평소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여행 준비물에 빠짐없이 노트와 아이패드를 챙겨가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었다.

그래서 정말 옷가지만 챙겨 떠나는 여행이 되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향한 곳은 새별오름이었다.

해가 쨍하고 뜨기도 전에 도착한 새별오름은 생각했던 것보다 그냥 오름 직해 보이는 동산 같아 보였다.

연말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포근한 날씨에 우리 두 사람은 오름의 정상까지 오르기로 했다.

가녀린 몸을 하늘하늘 흔들고 있는 억새를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그저 둥근 동산 같았는데 오르기 시작하니 꽤나 버거웠다.


제법 많이 올라온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보니 겨우 중간지점 즈음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등 뒤로 펼쳐진 장관에 감탄사를 한 번 내뱉었다.

조금만 더 버터서 정상까지 올라가면 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생겼다.

신랑과 서로 독려하며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 거의 다 왔어”를 외쳐주며 계속해서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정상에 오른다는 건 

이렇게 많은 힘을 들여야 하고, 이렇게 많은 땀을 쏟아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숨이 차오르고, 발목이 아파오고 

다음날이 되면 분명히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온몸이 쑤실 것을 예감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오르고, 또 올랐다.


정상에 도착해서 내려다본 아래의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 그 자체였다.

잠시 아무 말 없이 그저 내가 올라왔던 길목을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노력이라는 건, 할 수 있는 만큼이 아니라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어떠한 한계를 넘어섰을 때 할 수 있는 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순간, 한 걸음으로 목적지까지 도달해 버리는 노력은 없는 것이다.

꾸준한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정상으로 데려다주는 것.

새별오름 정상에 오른 날 정말 오래간만에 스스로 다짐을 했다.


‘노력했다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라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서른 살.

무기력함에 허우적거린 한 해.

그 무엇 하나 시원하게 이뤄낸 것 하나 없지만

그래도 지금 쯤 나는 새별오름 중간지점쯤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런 성과는 이뤄내지 못했지만 도전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고

번번이 좌절감을 주던 크고 작은 낙방과 실패는

그래도 내가 과정의 머물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으니까.


어쩌면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과정에 길목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당황스러워도 하고 이런 반복된 일상들이 나를 또 무기력하게 만들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지금의 나는 작년의 나와 또 다른 조금은 단단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과정이 다 지나고 난 뒤, 정상에 서서 걸어온 지난날들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날이었다.


사소한 빛


무기력증을 극복하고자 신랑과 단 둘이 제주도 여행을 떠났었다.

생각해보면 한 겨울에 한파를 뚫고 떠났던 여행이었기에 참 추웠던 여행이었지만

마음은 따뜻했던 여행이기도 했었다.


여행은 그저 일탈일 뿐 

복잡하고 아픈 마음들을 백 퍼센트 해소시켜 주지는 않았다.

여행은 해결사도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그저 내 인생에 추억 하나를 얹어주는 도구 일 뿐이고

그 에너지로 일상에서 버틸 힘을 선물 받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 여행도 그랬다.

나의 무기력증은 2박 3일의 여행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김포공항에 곧 착륙한다는 안내멘트가 들려왔다.

그 순간 창밖을 내려다봤다.

서울의 야경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잘 자잘한 빛들이 모여 어두운 밤을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가 만든 열등감에 비교의식에 또 여러 관계들로 인해 아팠다.

그 지독한 병은 스스로를 앓게 했고 쓸모없는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빛은 결코 혼자서 세상을 밝힐 수 없듯이

나도 작지만 어딘가에서 빛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컴컴한 바다 전체를 비추는 등대 같은 큰 빛은 아닐지라도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작은 빛들 중 하나 정도는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주 작은 역할일지라도 내가 비춘 빛은 다른 빛들 틈에서 열심히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결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빛이었구나.


나 혼자 힘든 게 아니야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날이었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리랜서의 업무 자체가 스케줄이 일정하지 않다 보니 수입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나도 아르바이트를 알아볼까?라는 생각을 했다.

평소의 나였더라면 전공과 관련된 업무를 찾아봤을 테지만

희한하게 전공과 무관한 업무를 하고 싶었다.

최대한 단순하면서 머리 쓰지 않는 그런 일이 하고 싶었다.

서른 살에 도전한 단기 아르바이트는 바로 대형 출판사 집책 아르바이트였다.

근무지는 대형서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큰 규모의 창고형 컨테이너 박스이다.

장르별로 구역이 나눠져 있고 소설, 에세이, 문제집, 만화책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조성되어있다.


나는 야간근무를 했는데 야간근무자만 해도 나 포함 50명이 가까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업무내용은 담당자가 도서 리스트를 출력해서 주면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리스트에 있는 책들을 찾아서 포장 대에 가져다주는 업무다.


정말 뜻밖에도 그 집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무기력증에서 조금 벗어 날 수 있었다.

절대 벗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길고 긴 무기력증이었다.

쳇바퀴 굴러가듯 아무런 변화가 없는 똑같은 일상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단순한 아르바이트는 내 나름의 신선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신선한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나답게 살자’ 붐이 일고 있었는데

대부분 힘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기 자신이 주체였고 그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독자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책들이 트렌드였다.

조금이나마 나답게 살길,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내민 위로 같은 것이었다.

책 제목에도 위로를 많이 받았지만 나 같이 마음의 병을 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라는 생각에 아주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위로되었던 도서의 제목이 있었다. 

<마흔에는 어른이 될 줄 알았다.>였다.

서른 살의 나도 마흔의 누군가도 세상이 선을 그어둔 어른이라는 기준에 

아직까지 나다운 게 무엇인지 찾지 못한 채 지금도 어른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나답게 살아라, 너무 열심히 살지 마라. 가 건네는 위로는

어쩌면 가장 어른다워질 수 있는 힌트일지도 모른다.


그때 도서의 제목들로 상당히 많은 위로를 받았는데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꽤나 오래간만에 간절해졌다.

내 아픔이, 내 자격지심이, 내 열등감이 누군가의 공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그 단기 아르바이트는 내 삶을 꽤나 많이 바꿔놓았다.

겨우 한 달여간의 시간이었지만 단순한 업무에 몸을 내던져놓고 나니

몸과 생각, 마음까지 조금씩의 변화가 생겼다.

그 집책 알바가 끝난 뒤 작은 용기가 생겼다.

그 후로 반년 여간 짧게 직장생활을 했고

아직까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안녕, 무기력


무기력은 여전히 나를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처럼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 안에 꽁꽁 잠재되어 있다가 불시에 항체를 뚫고 다시 재발할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인정받고 싶고

여전히 좋은 사람이고 싶고

여전히 관계 속에서 아파하고 힘들어한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조금은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 중이고

그동안 스스로와 단절되었던 소통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삶이 아닌 나 스스로가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볼 것이다.


행복 한 척으로 다른 사람은 속일 수는 있어도

나 자신은 속일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나 스스로가 나를 조금은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무기력과 조금은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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