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사 철학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Jan 09. 2024

연민의 방향

관계에서 오는 의미에 관하여

사람들은 정신 건강이 자기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통찰이 생기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으면 그 순간부터 달라지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수록 우리는 비참해진다. 자의식에 관한 모든 설명은 부정적인 감정을 동반한다.


자의식에 몰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연민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인생의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기분을 즐긴다 해도 이것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나의 유용한 능력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때 만족을 느낄 수 있다.


그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내 머릿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생기는 만족감이다. 관계에서 오는 책임을 다했을 때 오는 만족이다.


나는 왜 글쓰기를 좋아하는가? 기록을 위해서? 생각 정리와 감정의 해소?

물론 그런 측면이 없진 않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할 필요는 없었을 테다.


그렇다면 나는 왜 브런치에 글을 쓰는가?


이곳에 글을 쓰며, 나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기를 기대한다. 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내 생각에 공감하고 위안을 얻으며, 더 나아가서 그들의 삶이 더 나아지는 쪽으로 행동하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나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한 말과 행동, 작가와 독자 사이의 조화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책을 내고 유명한 작가가 된다 해도, 그런 일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사회와 거기서 피어난 '관계'를 위한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중장기적으로 목표해야 할 것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보다 넓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한다.


뚜렷한 목적 없이 유튜브 숏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등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doom scrolling"이라고 한다.  


음란물과 같은 쉽고 값싼 쾌락에 자신을 팔아버리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삶을 지옥으로 몰아 넣는 길이다.


욕구를 해소할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쟁취하는 것을 포기한다.

진정으로 인생에서 값진 것을 위해 노력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멀쩡하던 사람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우울해진다.


야동이 욕구를 해결해 주면, 더 넓은 의미에서의 '성'을 모조리 포기해 버리게 된다. '관계'한다는 것은 야동 따위보다 더 고차원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이니까.


퇴화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훈련하는 것이다.


"내가 제일 중요해", "인생은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그렇게 우리는 짧은 행복에 집중하며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게 요즘 유행하는 자존감이다.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그것은 곳 내가 '지금 당장'원하는 것으로 바뀐다. 스스로를 깊게 파고들수록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충동에 집중하게 될 뿐이다.


사실 나의 존재라는 개념은 이 사회와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파고드는 자의식은 '내'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사회적인 의미에 빗대어 정의 내리기 때문이다.


관계 지을 남이 없다면 나는 무슨 의미인가? 읽어줄 이 없는 나의 글은 무슨 의미인가? 하얀 바탕위의 검은 무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글을 쓰면서 힘이 되는 것은 독자들의 좋아요와 댓글이다. 많은 반응을 얻을수록 좋은 글을 썼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건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자와 나 사이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보상과 상관없이 '책임'을 다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책임감을 짊어지는 것이야 말로 모험 그 자체다.


누군가는 보상을 바라고 하는 일을 그냥 하고 싶어서 해보는 것이다. 일 하는 것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보상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는 것 같다. '의미'가 좀 더 맞는 말 같다.


의미로부터 우리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의미는 관계로부터 나온다. 나는 아들이자 남편이다. 좋은 친구이자 형제, 남매다. 이런 정체성은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드러난다.


나중에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아이와 나의 관계를 통해 '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와 함께 나도 성장하면서 아이의 멘토가 되어보기도 하고, 나보다도 소중한 존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 건강은 그런 관계를 통한 내면의 성숙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심리구조가 어쩌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은 내부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약하고 못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누구에게든 처음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삐뚤어진 사랑으로 인해 나의 약점을 직시하지 못한다. 드러내기를 꺼려한다. 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자기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부터 바로 파악해야 한다.


아름답지 못한 나와 마주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은 괴롭고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마저도 '느낌'이기에 무덤덤하려 노력하다보면 어느 순간 지나간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아침은 찾아오는 것처럼.


책임, 관계, 의미.


우리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어 하면서도, 늘 찾아 헤매던 것들.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나오자. 머릿속에서 '너 따위가? 그냥 쉬면 편해'라고 속삭여도 당차게 'X까'라고 해주자.


자의식에서 조금씩 벗어나면 불안은 차츰 사라진다.


연민의 방향을 '나'가 아닌 '세상'으로 돌리자.


//위 글은 아래의 영상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LMaXUXvUW4


//영상에 감화되어 따라 적기도하고 깨달은 듯이 쓰기도 했는데, 어쩐지 똥글같네요. 하하. 그래도 눈 밝으신 독자님들은 흙속에서 진주를 발견하실지도 모르잖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는 게 고통이라면 굳이 아등바등 살 이유가 뭐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