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 지구과학 이야기
프랑스 파리는 낯설다. 중심부에는 1층이 상점인 6층 내외의 흰석재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예외가 없다. 이런 건물은 도시의 통일성을 제공하고 높은 인구밀도를 견뎌낸다. 중심에서 외곽으로 사통팔달로 시원스럽게 뚫린 길 끝에 놓인 이정표 건물은 내 위치가 어디인지 착오없이 알려준다. 이렇게 해놓으니 거래가 활성화되고 문화예술인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정돈된 파리의 모습을 그린 이가 구스타프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1848~1894)이다.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파리의 거리:비 오는 날>이다. 1877년 제3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은 파리 북쪽 생 라자르(Saint-Lazare) 역 근처의 더블린 광장의 비 오는 날을 그린 그림이다. 잘 정돈된 건물과 길을 세련된 남녀가 팔장을 끼고 걷고 있다. 오늘날 느낄 수 있는 파리의 낭만과 세련미가 잘 느껴지는 작품이다. 생 라자르 역은 1877년 클로드 모네가 연작을 그린 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19세기 초까지 파리는 악취가 진동하는 더럽고 지저분한 도시였다. 파트리트 쥐스킨트(Patrick Süskind, 1949~)의 소설을 영화화한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2007)에서 보면 하수구도 없는 거리에 오물과 쓰레기가 넘쳐났다. 썩는 듯한 냄새 속에 주인공 그루누이의 탄생장면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그 오물은 센강으로 흘러들고 그걸로 향수도 만든다. 향이 나긴 할 것 같은데 원하는 향은 아니었으리라.
파리 개조 사업은 1853년부터 1870년까지 17년간 진행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재건설한 사업이다. 쿠데타의 성공으로 대통령에서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Louis-Napoléon Bonaparte, 1808~1873, 대통령 1848~1852, 재위:1852~1870)는 오스만 남작(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을 파리시장으로 임명해 대대적인 도시 정비 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파리 시내는 좁고 구부러진 도로가 많았다. 게다가 도심은 비위생적이며 교통체증 현상이 극심했기 때문에 밀어붙였다. 한편으로는 제2제정의 입장에서 이런 구조가 바리케이드를 쉽게 설치할 수 있어 당시 빈번하던 정권을 흔드는 시위의 진압에 난점으로 작용했다.
오스만 남작은 정비사업을 통해 도로 폭을 넓히고 직선화했고 현대적 상하수도망으로 재정비, 가스 가로등 설치, 대규모 녹지 조성 등을 통해 위생상태와 도심 생활환경을 크게 개선하였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의 <레 미제라블>(1862)에 나오는 파리 지하의 하수도는 이때 만든 것이다. 이 책에 당시 사회상이 잘 나와 있다. 병인양요(1866) 때 황제였다.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의 아들인 나폴레옹 3세는 말년과 후세는 잘 안 풀렸다.
한편 오스만 남작의 계획에는 몇 가지 되새겨 볼만한 것이 있다. 우선 건물은 도로의 폭에 따라 4가지 높이로 제한 됐다. 폭이 넓은 도로에 접할수록 높은 건물이 가능했다(11.7, 14.6, 17.55, 20m). 1층은 카페나 상점으로, 그 위는 주거시설로 사용토록 했고 지붕의 형태, 색상 그리고 기울기도 규제하여 건물의 통일감을 부여했다. 2층의 층고가 가장 높고 그 위로 갈수록 낮아지게 하였다(그래서 하인과 가난한 유학생들은 꼭대기층에 살았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이 건물의 외장재는 당시 파리 근교에서 생산되는 석회암만을 사용토록 했다는 것이다.
파리를 만드는 데 사용된 것은 석고(gypsum)와 석회암(limestone)이다. 파리는 예전에 지향사로 알려진 해침과 해퇴가 반복된 퇴적분지이다. 파리의 석회암은 루테티아 석회암(Lutetian limestone)이라고 부른다. 석회암은 4,780~4,120만 년 전 신생대 에오세 시기인 루테티아 절(age)에 퇴적된 것이고, 석고는 증발암으로 약 3,500만 년 전에 파리분지가 고립되어 증발만이 일어났을 때 만들어졌다. 파리 분지의 지층이 압축작용을 받아 센 강 남쪽이 솟아올라 오래된 지층이 노출되어 있다.
파리 지역에는 일반적인 세 가지 현상으로 인한 지질학적 위험이 도시 군데군데서 나타난다. 예전의 지하 채석장과 관련된 국소 지반(붕괴), 석고가 용해되어 만들어진 싱크홀(몽마르트르 지역) 그리고 점토가 물을 흡수하여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다. 후자의 경우, 특정 기후 조건에서 약간 부풀어 오른 다음 점토 지반이 침하하는 것으로 지표면에 나타날 수 있다.
아래 지질도에서 보듯이, 파리의 센 강 남쪽은 석회암 지역이다. 지금은 파리의 시경계가 확장되었지만, 19세기 초만 해도 파리 외곽이었다. 이 지역에서 파리 정비를 위한 석회암이 많이 채굴됐는데, 채굴방식이 산째로 허무는 방식이 아니라 지하에서 석회암층을 파내어 지상으로 거중기를 통해 옮기는 방식이었다. 결국 파리 지역의 지하에는 이런 석회암 광산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파리의 석회석은 이 시기에만 채굴된 것이 아니다.
서양의 묘지는 형태와 위치가 우리와 다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산지가 많고 튼튼한 암반이 많아 지표의 토양층만을 걷어내고 묘지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분지 지역인 파리나 서양의 도시의 경우, 일부러 산을 찾기도 어렵고 멀리 가기도 힘들어서 주거지 부근에 일정 구획을 정해 묘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관리와 미관상 석재를 이용하여 현재 우리 납골묘와 유사하게 만들게 된다.
아무래도 일반인의 주거지가 우선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만들 당시에 토지의 이용효율이 떨어지는 지역이 묘지로 선정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 예를 파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파리 18구에 있는 몽마르트르 묘지(Cimetière de Montmartre)이다. 파리시의 가장 큰 묘지인 페르 라셰즈 묘지(20구, 발자크, 마리아 칼라스, 콜레트, 에디트 피아프 등 안장)와 몽파르나스 묘지(14구, 보들레르, 샤르트르&보부아르 등 안장)에 이은 파리에서 3번째 큰 묘지이다. 1825년에 조성되었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사크레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 de Montmartre)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진 이 묘지는 베를리오즈, 달리다, 드가, 뒤마, 하이네 그리고 에밀 졸라가 묻혀 있다. 이 묘지는 갈로-로만 시대(BC50)부터 석고를 채석했던 채석장 위에 지어졌다. 석고가 대부분 그렇지만 파리의 석고는 매우 하얗고 입자가 고와 많은 기념물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채석을 하면 구덩이가 생기게 마련이고 따라서 주변보다 낮은 곳에 묘지가 조성됐다. 묘지 위를 지나는 카울랭쿠르 다리는 1888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당시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지구과학자는 퀴비에(Jean Léopold Nicolas Frédéric Cuvier, 1769~1832) 일 것이다. 지중해 해안의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출생하여 가정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남는 시간에 바다 생물을 연구하고 있었다. 직접 해부하고 자세한 그림을 드리며 연구를 해서 비교생물학에 실력을 갖춘다. 파리자연사박물관이 설립된 다다음해인 1795년 비교해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퀴비에는 25세였고, 프랑스는 나폴레옹 1세 치하의 유럽 과학의 중심지였다.
그는 동물의 기관이 비슷하면 유사한 기능을 했을 거라는 '동물기관 상관의 법칙'을 알아내고 뼈 하나만 보고도 다른 부분의 형태를 예측하는 등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파리 주변의 화석을 조사한 퀴비에는 시대에 따라 발견되는 화석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로써 진화론에 반대하여 '천변지이설'이란 개념을 생각해 내었다. 비록 격변과 멸종이 되풀이되어 어떤 생물군은 멸종하고 살아남은 종만 분포한다는 이론이었다. 당시 나폴레옹에게도 딱 맞는 이론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승승장구하여 잘 살고 잘 죽는다.
퀴비에의 이름은 1904년 파리 18번가 Ronsard 거리 북쪽 끝에 있는 Square Louise-Michel 벽에 설치된 기념 명판에 적혀 있다. “여기에는 고생물학의 창시자인 퀴비에의 연구를 위해 1798년에 사용되었던 화석 뼈가 발견된 몽마르트르 채석장의 입구가 있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그가 발견하여 연구한 화석은 오늘날에도 파리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퀴비에는 오늘날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을 확립한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카타콤(Catacomb)은 로마 주위의 지하무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현재는 굴과 방으로 이루어진 시설을 의미한다. 로마의 카타콤은 묘지용으로 일부러 만들어진 것임에 비해, 파리의 카타콤은 채석장을 이용하였다는 것이 차이가 있다. 퇴적암 지역이라 마치 탄광처럼 지하가 갱도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18세기 후반, 파리는 넘쳐나는 묘지에 시체가 쌓이고 때로는 매장 후 다시 표면에 드러나는 등 엄청난 미관, 건강상의 문제에 봉착했다. 이에 1763년 루이 16세는 파리시 경계 내에서 모든 매장을 금지했다. 그러나 교회의 반발로 유야무야 되었다. 1780년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매장지인 성 이노센트 묘지(Saints Innocents Cemetery) 근처에 사는 파리 시민들은 악취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묘지 옆에 있는 지하실 벽이 쌓여가던 무덤의 엄청난 무게로 인해 무너졌다. 주민 불만이 정식으로 제기되었고, 1786년 당국은 성 이노센트에 묻힌 많은 유해를 원래 지하 채석장으로 사용되었던 센 강 남쪽 몽수히 공원(Parc Montsouris) 아래의 터널로 옮겨 문제를 해결했다. 이것이 카타콤이 유골보관장소가 된 사유이다.
사실 이 카타콤이 언제, 왜 만들어졌는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로마인들과 파리인들이 석회석 채석용으로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 등이 이를 은신처로 활용하였고 현재는 인기 관광지가 되었다(전체의 0.6%에 불과). 현재 약 600~700만 구의 유골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가 파리다운 이유는 파리 밑에 있는 석회석 때문이다. 이 돌은 말그대로 파리의 기반이었고 파리사람들은 땅속의 석회석을 파내 땅위에 쌓았다. 그리고 죽은후 석회석을 파낸 굴속에 안치됐다. 지금도 파리 지하의 개미굴 같은 석회석 터널 때문에 구시가지에는 높은 건물의 건축이 금지되어 있다. 다른 대도시처럼 파리도 지질학적 조건의 지배를 받아 만들어진 도시다.
하계 올림픽이 한참 열리고 있는 프랑스 파리는 여러 모습을 갖은 도시이다. 예전에는 파리에 가면 에펠탑을 오르고 루브르 박물관을 가고 달팽이를 먹으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서울이 단순한 도시가 아니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듯이, 당연히 파리도 다양한 이야기와 볼거리가 많다.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은 언제나 다른 시각에서 생긴다. 그러면 현지인도 모르는 파리를 볼 수도 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란다.
Je vous souhaite un bon voyage!
참고문헌
1. 위대한 박물학자, 로버트 헉슬리, 21세기북스, 2009
2. Wikipedia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