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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May 19. 2024

지진을 승화시킨 아르데코 도시, 네이피어, 뉴질랜드

뉴질랜드 3부작 - 2부

뉴질랜드 북섬의 남동부에 위치한 네이피어는 북섬의 9개의 행정단위(지방, region) 중 인구수에서 7번째인 한가한 혹스베이 지방의 주도이다. 온난한 기후와 긴 일조량으로 포도주가 유명하고 양모, 펄프의 수출 항구로 중요한 살고 싶은 사랑스러운 동네이다.


하지만 시내를 다녀보면 굉장히 특이한 외양의 건물들이 많다는데 깜짝 놀라게 된다.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파스텔톤의 낭만 가득한 아르데코 풍 낮은 건물들이 시가지에 가득 채워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세계 아르데코 양식의 수도 (The Art Deco Capital of the World)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뉴질랜드 최초로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매년 2월 네이피어 시가지에서는 Napier Art Deco Festival 축제가 열려서 20-30년대 아르데코와 스윙 시대의 유행을 재현하고 있다


1910년의 네이피어 거리(1910), source: wikimedia commons by National Library NZ on The Commons


네이피어는 1880년대 중반 유럽 이민자들이 들어오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지역은 저습지 지역으로 농경이나 거주에 불편했고, 폭풍우 때는 바닷물이 들이치는 낮은 지대였다. 최초에는 지금 도심지의 북쪽 블러퍼 언덕(Bluff Hill)에 거주지가 만들어졌다. 이후 방파제를 쌓아 오늘날의 도심지가 형성되었다. 이때 죄수들을 동원했는데 당시의 감옥이 그대로 남아 여행자에게 즐거운(?) 감옥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1931 혹스베이 지진(Hawke's Bay earthquake)


1931년 2월 3일 오전 10시 47분, 네이피어사 포함된 혹스베이 지역에 규모 7.8Ms(표면파 규모) (7.7Mw, 모멘트 규모)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네이피어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이었으며 진원의 깊이는 14km로 비교적 얕은 지진이었다. 당일 여진은 2분 30초 동안 지속되었고, 그 후 2주 동안 525번의 여진이 발생했으며, 2월 말까지 597번의 여진이 기록되었다.

                                                                                              

뉴질랜드의 주요 단층선(붉은 별표시가 네이피어), Source: wikimedia commons by Mikenorton


이 지진으로 256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혹스베이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사망자는 네이피어 161명, 인근 도시 헤이스팅스 93명, 로이로아 2명이었다. 5,000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진은 오늘날까지 뉴질랜드에서 가장 치명적인 자연재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지진으로 네이피어를 포함한 혹스베이 지역은 건축, 생활양식 등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파괴된 시청 건물, 1931 Hawke's Bay earthquake. Source: wikimedia commons by  Archives New Zealand


붕괴된 세익스피어 로드의 우체국 앞을 수병이 지나고 있다(Napier, 1931), Source: wikimdeia commonArchives New Zealand


지진은 인도-오스트레일리아 판의 주변부에 있던 뉴질랜드 아래쪽으로 태평양판이 섭입되면서 일어났다. 이 에 따른 해양퇴적물의 부가대에서 단층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진동은 북섬의 남쪽 절반 부분에서 느낄 수 있었다. 네이피어와 헤이스팅스의 중심 지역에 있는 거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다. 네이피어 주변의 해안 지역이 약 2m 정도 상승하면서 지역 풍경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지진의 피해는 지진의 직접적인 충격과 이후 발생한 화재에 의한 것으로 나눠진다. 지진의 충격 직후 화학제품 공장에서 화재가 시작되었다. 이 건물에서 인근 건물로 화재가 번졌다. 당시 건조한 날씨가 이어진 후의 덥고 맑은 날씨여서 화재가 확산되기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바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어 블러피 힐 쪽으로 확산됐다. 도시의 어느 곳도 화재에서 안전한 지역은 없었다. 또한 지진으로 상수도관이 파괴되어 화재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다. 화제는 다음날 오후에나 잦아들었다.


지진으로 파괴된 Napier Technical College, 9명이 사망했다. Source: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 지진은 기존의 뉴질랜드 건축 법규에 대해 철저한 검토를 하게 만들었는데, 과거의 건축법규는 이러한 재앙에 무방비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은 보강이 되었다.


오늘날까지 혹스베이에는 5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네이피어의 재건이 아르데코가 유행했던 1930년대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네이피어 건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아르데코 컬렉션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헤이스팅스 또한 많은 아르데코와 스페인 미션 스타일의 건물로 함께 재건되었다.

1931년 지진 사진을 담은 엽서, source: wikimedia commons by State gevernment photograph , public domain


주변 지역의 상승


지진 직후에 사람들은 해안선이 물러난 것을 눈치채고 마린 퍼레이드 해변에서 탈출했다. 쓰나미가 오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쓰나미에 대한 지식이 적었지만 뭔가가 오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진 후에 네이피어 주변 해안 지역이 약 2미터 정도 상승하여 현지 풍경이 극적으로 변했다.  특히 40여 평방 km에 달하는 해저가 메마른 땅이 된 것이다. 이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와 조개들이 해안에 가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래지도에서 보듯이 아후리리 라군(Ahuriri Lagoon)이 포함되었는데, 이 라군은 2.7 미터 이상 상승되어 3,600 헥타르 (9,000 에이커)의 라군에서 물이 빠졌다. 오늘날 이 지역은 혹스베이 공항, 주택 및 산업 개발 및 농지가 위치해 있다.


지진 전후의 네이피어 북쪽 지역의 지형 변화, Source: wikimedia commons by  CrashesToAshes


영국 해군 함정 HMS 베로니카의 활약


베로니카 함의 봉사와 희생을 기린 Veronica Sun bay 기념 건물, Napier, Source: wikimedia commons by russellstreet  


네이피어 해변이 관광안내소 옆에 위치한 '베로니카 선 베이'는 1931년 2월 3일 발생한 혹스베이 지진에서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34년에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HMS 베로니카와 재난 당시 베로니카의 장교들과 승무원들이 행한 뛰어난 봉사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혹스베이 지진 후 HMS 베로니카, 출처: 웰링턴 알렉산더 텀불 도서관


당시 네이피어 항구에 정박 중이던 영국 해군 함정 HMS 베로니카는 지진 후의 구호활동에 큰 역할을 했다. 지진 후 몇 분 안에 베로니카호는 도움을 요청하는 무선 구조 신호를 본부에 보냈다. 선원들은 화재와 싸우고, 갇힌 사람들을 구조하고, 그들에게 치료를 제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생존자들과 합류했다.


두 척의 화물선인 노섬벌랜드호와 타라나키호의 선원들도 구조 작업에 합류했고, 두 척의 순양함인 HMS 디오메데호와 HMS 더니딘호는 음식, 텐트, 의약품, 담요, 그리고 의사와 간호사로 구성된 팀과 함께 그날 오후 오클랜드를 출발했다. 순양함들은 밤새 고속으로 항해했고, 2월 4일에 도착해서, 2월 11일에 떠날 때까지 모든 부분에서 피해복구에 도움을 주었다.




새로운 도시의 건설


지진에 따른 자치구 의회가 대응하기 어려워 치안판사이던 존 바튼과 엔지니어인 라클란 베인 캠벨이 재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다. 1935년 5월 15일에 자치구 의회가 선출될 때까지 재건업무를 담당했다. 1931년 4월 8일 혹스베이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중앙정부의 지원에 대한 법률적인 기반이 만들어졌다. 피해를 입은 기업과 개인에게 대출을 해주는 것이 포함된 이 법은 의미는 있었지만 충분하지는 못했다. 당시 대공황으로 인해 자금을 모으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대신 많은 돈이 자선 단체에서 지원되었다.


지진 이후 클라이브 스퀘어에 있는 틴 타운(Tin Town)이라고 불리는 쇼핑센터를 포함하여 여러 임시 구조물이 새로 만들어졌다. 약 2년 동안 남아 있었고, 50개 이상의 사업체가 입주했으며, 갚지 않아도 되는 10,000파운드의 대출로 조성되었다. The Press 보도에 따르면, 그것은 세계 최초의 "팝업 몰"이었다고 한다.


지진으로 제반 서류와 기록이 모두 유실되었고 지형이 변형되어 바닥에서부터 다시 조사하고 측량해야 했다. 지진 10주년에 뉴질랜드 리스너는 네이피어가 불사조처럼 잿더미에서 일어섰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1931년 네이피어 여고 교장의 말을 인용해 "오늘날 네이피어는 이전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운 도시"라고 전했다.


아르데코(ARTDECO)란


아르 데코 양식(Art Deco Style)은 직선과 곡선의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형태와 원색을 통해 강렬한 느낌을 주는 간결미가 특징인 1920년대~1930년대를 대표하는 미술 양식 중 하나이다.


네이피어의 아르데코 거리, source: wikimedia commons by Phillip Capper
Quest Apartments, Napier(2010), Source: wikimedia commons by anne beaumont
네이피어의 주택(2014), Source: wikimedia commons by N Chadwick


아르데코는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현대장식미술·산업미술국제전(Exposition Internatinale des Arts Decoratifs et Industriels Modenes)'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이전에도 없던 양식은 아니었고, 1910년대인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도 이미 나름 유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축 및 실내장식, 가구, 의복,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는 역시 1920년대부터다.


역사학자 베비스 힐리어(Bevis Hillier)는 아르데코를 "비대칭보다는 대칭을, 곡선보다는 직선을 지향하고, 기계, 신물질, 그리고 대량생산 수요에 적합한 현대양식이다."라고 정의했다.


Hawke's Bay Chambers(2010), Source: wikimedia commons by Russell James Smith


비규칙적인 곡선과 꽃, 여성 등을 묘사하여 예쁘게 장식하는 걸 중요시한 아르누보와는 달리 대칭적인 미 또는 패턴화 된 곡선과 직선의 조화, 강한 힘을 보여주는 남성적 조각 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건축에서 브루탈리즘(brutalism, 르코르뷔지에가 사용한 프랑스어 용어인 béton brut(가공되지 않은 콘크리트)에서 유래)과 많이 엮여서 거대한 콘크리트로 만든 브루탈리즘 외부 양식에 내부는 아르데코적인 모습을 적용한 건물이 당대 강대국이던 미국과 러시아, 독일 등 에서 많이 건설되었고 지금도 명소로 남아 있다.


또한 당시 활동했던 바우하우스의 영향도 받았으며 특히 떠오르는 나라였던 미국, 그중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1930년대 뉴욕과 시카고 등의 대도시 큰 규모의 건물에 크게 유행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아르데코가 상업과 공업의 발달로 인해 디자인과 타협했다는 평도 있지만, 고대 그리스 때부터 구현하고 싶어 했지만 소재와 시공기술 부족으로 힘들었던 '완벽에 가까운 대칭적이고 기하학적인 패턴들의 구현과 그 조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아르데코는 이집트와 잉카, 발레뤼스(러시아) 등의 이국적이면서 동유럽적인 비유럽 느낌을 주기도 한다고 한다. 건축뿐만 아니라 영화, 패션, 선박, 자동차 등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친 우리에게도 친근한 디자인 양식이다. 


다른 나라의 아르데코 건물들


사실 아르데코 풍의 건물의 진수는 1930년대에 지어진 미국 뉴욕의 록펠러 센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크라이슬러 빌딩이다. 중국 상하이의 황포강변 와이탄은 1920~30년대에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풍의 건물을 많이 지었다. 대표적인 것이 와이탄 14호 건물인  교통은행(Bank of Communication) 빌딩이다.


이 밖에도 미국 마이애미 비치의 사우스비치에도 파스텔톤의 아르데코 건물들이 모여있다. 이 지역에는 모두 1,000개의 건물이 있는데, 이 중 300개가 아르데코 풍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아르데코 유행이 좀 지난 1950년대에 유행한 Streamline Moderne 양식이다. 1972년 미정부는 이 지역을 국립 역사 지역으로 지정하였다.  


지진이 도시경관을 바꾼 사례


지진은 인구가 밀집되어 시설물이 많은 도시에서 발생할 경우, 인적, 물적인 피해가 크다.  진도가 약한 지진의 경우는 손상된 부위만 수선하면 되지만, 도시 기반시설을 파괴할 만한 큰 지진의 경우는 아예 도시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기존 상하수도, 전기 및 가스 시설 등의 파손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보다 싹 다시 짓는 것이 경제적이고 믿을만하기 때문이다.


1755년 리스본에 발생한 지진은 5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건물 1만 채 이상을 파괴했다. 당시 포르투갈 국왕이던 주제 1세(D. Juse I)는  카르발류에게 도시재건의 전권을 주고 맡겼다. 장래미사 없이 시신을 신속히 묻었고 도시계획법을 공포하여 재건에 나섰다.  4층이상은 건축할 수 없었고 '가이올라' 공법을 적용하여 지진에 강한 건물을 짓게 했다. 또 지진 시에 안전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도로를 크게 넓혔다. 오늘날의 리스본의 모습은 이 지진을 극복한 모습이다.


1923년 9월 1일, 일본 동경 인근에서 규모 8.1의 지진이 발행했다. 우리가 잘 아는 관동 대지진이다. 최소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수십만 명이 부상당했다. 여진이 15번이 발생하면서 정부기능이 마비되었고 아비규환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가옥 11만 채가 파손되고 10만 채가 반파됐다. 이 지진은 결국 일본 군국주의에 불을 붙이게 됐다. 대부분이 목조였던 이 지역에 화재가 발생하고 화재선풍으로 막대한 인명이 희생되었다.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쉽게 파괴되는 것으로 밝혀져 콘크리트 건물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재민을 위한 아파트도 건축되어 아직까지 일부가 남아 있는데, 이 건물이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오모테산도 힐스'의 일부로 남아있다. 건축법이 강화되었고 일본에서는 아직도 9월 1일을 방제의 날로 기리고 있다.




치명적인 재해 속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갖게 된 현지 주민들의 노력에 큰 격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지진이라는 자연재해를 우리가 아직 예측하고 피할 수는 없지만, 이를 이처럼 훌륭하게 승화시킬지는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남겨진 숙제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다시는 지진의 피해를 받지 않고 잘 유지되기를 소망해 본다.



참고문헌


1. 권기왕,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상상출판, 2013

2. 김영찬, 디자인의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3. 나무위키

4. 네이피어 주의회 홈페이지 napier.govt.nz

5. 전명윤, 김영남, 상하이 100배 즐기기, 알에이치코리아, 2020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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