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더믹 기간에 홈술과 혼술 문화가 확산되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국내 위스키 시장이 급성장(2022~2023 수입액 각 2억 달러)했다. 이에 따라 여러 업체들이 증류소 신설을 추진했다. 올해는 하이볼이 유행하면서 수입액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국내 위스키 시장은 이제 손 놓고 있기에는 큰 시장이 되어 버렸다. 신세계엘앤비(L&B)는 제주 푸른 밤 공장부지(조천읍 와산리)에 증류소를 추진하다 포기했지만, 롯데칠성음료는 꾸준히 제주도 서귀포시에 증류소를 추진하고 있었다.
롯데칠성음료 서귀포 제주감귤공장, 출처: 네이버 지도
롯데는 당초 2024년 내에 서귀포시에 제주증류소를 착공하고 2025년 2분기 완공하여 2026년부터 시생산에 들어갈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에 있는 유명한 아드벡 증류소 출신의 한국인을 영입하였다고 알려졌다(현재는 일정이 늦어짐에 따라 타사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당초 서귀포 남원읍의 제주감귤공장(년중 2달만 가동) 부지(신례리 94-1)에 설립하고자 했지만 지하수 문제 등 인허가문제, 공장 세부 설계 시간 지연, 주민들의 반발 등으로 무산되고, 서귀포 한남리에서 제2의 부지를 찾아 2024년 상반기 중 설계 완료, 4분기 내에 인허가 및 착공에 들어갈 것을 목표로 최근까지 측량 작업을 실시했다.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아드백(Ardbeg) 증류소, 위키미디어: Rob Farrow
그런데 이 과정에서 뜻밖에 천연동굴이 발견되어 회사는 경유기관을 거쳐 국가유산청에 신고하였다(제목사진은 만장굴). 신고를 하지 않고 이를 은폐했을 때는 회사의 신인도 하락, 법률적 책임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3일 롯데 측의 발표에 따르면 국가유산청의 조사결과,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보전 가치가 있는 문화재로 판단되어 공사 진행은 멈추어졌다. 아직 동굴의 길이, 환경 등 구체적인 정보가 나오지 않았지만 기대가 크다.
이에 롯데 측은 동굴도 보존하고 위스키 증류소도 설립할 가능성을 검토해 봤으나 동굴 보전 구역 이외의 면적만으로는 필수 건물 설립 및 공간 활용이 어렵고, 추가로 동굴이 발견될 가능성까지 예상되어 해당 부지는 포기하는 모양새이다. 결국 롯데칠성은 한남리 부지 내 위스키 증류소 설립이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또다시 새로운 제3의 부지를 찾기로 했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 동굴도 잘 활용한다면 아름다운 제주동굴에 훔뻑 취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서귀포 한남리, 네이버지도
보도에 따르면 롯데 관계자는 “당사는 위스키 사업 운영 방향에 맞는 신규 부지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각도로 검토할 예정이며 추후 확정된 사항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소통할 계획”이라고 말은 했지만 증류소의 꿈은 점점 멀어지는 분위기이다. 이미 당초 계획에서 한참 이탈된 가운데 위스키 시장의 성장세 역시 주춤하는 분위기여서 증류소가 건립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결국 위스키 증류소의 꿈은 지질학적 이슈 때문에 발목을 잡힌 모양새가 됐다. 애초에 지질학적 조사를 선행했다면 이번 사태는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심정이다.
소주 '새로'의 팝업스토어, 출처: 롯데 공식 블로그
요즘 롯데칠성은 동굴 때문에 웃고 울게 됐다. 롯데칠성의 소주 ‘새로’가 동굴 콘셉트의 성수동 팝업스토어로 흥행을 했기 때문이다. 이 팝업스토어는 ‘새로’의 캐릭터인 새로구미가 사는 동굴 주소를 따 ‘새로 02-57동굴’이라고 이름 붙였다. 제주도의 동굴에도 새로구미가 사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제주의 용암동굴
제주도는 화산암 지대로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만장굴(운영중단, 2023.12.29~2025.8.31), 협재굴, 미천굴, 당처물동굴, 김녕사굴, 쌍용동굴, 용천동굴, 빌레못동굴 등의 100여 개의 동굴이 발견되었다. 제주도에 산재하는 동굴은 오름에서 분출한 수차례의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지표면에 노출된 용암은 냉각되어 굳지만 아래쪽의 용암은 온도가 떨어지지 않아 점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흘러내리면서 용암이 있던 자리에 동굴 공간이 생기는 원리로 생성되었다.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와 지역 동굴들, 위키미디어
대표적인 곳이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이다. 이 동굴계는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거문오름(456m)에서 분출된 용암류가 지표의 경사면을 타고 해안 쪽으로 흐르면서 생성된 20여개의 동굴군으로 전체 길이가 14㎞로 추정된다. 2007년에는 이 동굴계에 포함된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등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느닷없이 발견되는 곤혹스러운 동굴들
유형문화재와 마찬가지로 천연기념물도 보존의 가치가 있는 경우 천연기념물로 분류되어 보존, 관리된다. 이 이야기는 토지이용을 위한 어떠한 작업 도중에 문화재, 동굴 등이 나오면 작업을 즉시 중지하여야 하고, 관계 기관에 신고한 후 그 가치를 판단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공사기간은 지연되고 사업은 엉망이 되기 십상이다.
문제는 이런 사례가 제법 있다는 것이다. 화산지형인 제주도 특성상 화산 용암의 운동으로 인해 생성된 천연 동굴이 적지 않다. 발견된 동굴만 100여 개가 훌쩍 넘고, 현재도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현무암지역의 특성상 과장을 좀 하자면 제주도의 땅속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을지도 모른다.
2023년 발견된 구좌읍 동굴, 출처: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지난 2019년에는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 섭지코지 근처의 콘도 신축공사장에서 천연동굴이 발견됐고, 2005년에는 구좌읍에서 전신주 설치를 위해 굴착하던 중 천연동굴이 드러난 사례(용천동굴, 3.4km, 천연기념물 466호)도 있다. 2020년 제주도 천연동굴 실태 조사 과정에서는 15개 동굴이 새롭게 발견됐다. 2023년 3월에는 구좌읍 동복리 일대에서 제주시가 추진하는 배수 개선 공사를 위해 터파기 작업을 하던 중 지하 2m에서 용암동굴이 발견됐다.
게다가 제주도에는 '숨골'이라고 불리는 용암동굴이 붕괴되거나 지표면 화산암류에 발달된 수직절리계 및 균열군 등에 의해 생성된 지형이 있는데, 과거에는 오폐수를 처리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285개소가 지하수자원보전지구 1등급으로 분류하여 관리하고 있다. 제주도 제2공항이 착공되면 이러한 동굴과 숨골을 아주 많이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 원활한 공사진행과 천연기념물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 제주도의 선재적인 지질구조 조사가 시급한 현실이다.
영월 분덕재동굴 내부 Ⓒ 국가유산청
제주도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동굴 발견은 드문 일이 아니다. 2020년 영월 분덕재 공사 중에 발견된 분덕재 동굴(총길이 1,810m)이 유명한 사례인데, 결국 천연기념물로 정해지면서 공사는 중지됐다. 이제 많은 공사현장에서 역사적, 지질학적 유물의 발견은 매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됐다. 그만큼 우리의 의식 수준이 올라갔다는 반증이고 그때를 맞춰 유물유산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모두가 우리 국토를 다시 보는 눈을 가져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