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 지구과학 이야기, 뉴질랜드 지질기행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선조님의 말씀이 있지만, 지구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황금도 돌의 구성 성분이니 동어반복이 아닌가? 실제로 금광산을 가거나 광석 중 금이 눈에 보이는 시료(그렇다 실험 대상일 뿐이다)를 보면 어떻게 여기에 이러한 금광이 생겼는지 먼저 생각하지 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리하면 돌도 다 금같이 보인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에서 금은 가장 가치 있다고 인정받고 있어 대범하게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비트코인이 나오고 사람이 달나라를 가는 시절임에도 금괴를 훔쳐 도망가는 영화가 나오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1848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금을 쫓아 수많은 사람이 몰려간 것을 두고 골드 러시(Gold Rush)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는데, 하지만 땅이 좁아 몰려갈 곳도 없어서 마을 앞 개울이나 논, 뒷산으로 달려갔다. 신기하게 파면 나오기도 했다. 당시 금 벼락부자 소식이 전 세계에 퍼지면서 곳곳에서 골드러시가 벌어졌다.
1851년에는 호주 빅토리아주, 1861년에는 뉴질랜드 남섬 오타고에서 골드 러시가 발생했다.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블랙힐스(1874), 알래스카 놈(1899), 그리고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 The Gold Ruch>(1925)의 시대적 배경이 된 캐나다 유콘준주 클론다이크(1896)도 유명하다. 우리가 방문했던 지역이 뉴질랜드 골드러시가 일어났던 중심지 오타고 지역이다.
퀸스타운에서 더니든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 8번 고속도로를 따라 2시간 반쯤(190km) 가면, 지금은 인적 없는 로렌스 타운(Lawrence town)이 나온다. 하지만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160여 년 전에는 북적거리던 중심지였다. 마을 초입에는 당시 금 채광에 사용하던 수압식 채광 대포가 전쟁기념관의 퇴역한 탱크처럼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또 반대편 초입에는 당시 시장이나 사업가가 아닌 광부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여기서 동북쪽으로 2km 지역이 당시 금 채광지였던 카브리엘 걸리(Gabriel's Gully)이다.
오타고 지역은 뉴질랜드 남섬의 남동부에 있는 행정구역으로 면적은 31,241㎢로 강원도의 2배쯤 된다. 인구는 198,300명(더니든만 13만 명 정도)인데 이는 강원도 인구 1,512,969명(2025.3.)의 13%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더니든 등 몇몇 도시를 제외하면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아래의 사진 대부분이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찍은 사진이 아니라 바로 찍은 것들이다. 그래도 애향심은 커서 골드 러시가 나름 잘 정리된 마을 박물관이 있었다.
오타고 골드 러시
1851년부터 시작된 호주 러시보다 10여 년 늦은 지난 1861년 5월에 호주 태즈메이니아 출신으로 빅토리아와 미국에서 금을 탐사했던 토마스 가브리엘 리드(Thomas Gabriel Read, 1825~1894)라는 광부가 중부 오타고의 로렌스(Lawrence) 인근 투아페카(Tuapeka) 강 유역,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 ‘가브리엘 협곡(Gabriel’s Gully)’으로 명명된 곳의 개울 퇴적층에서 대규모 금 너겟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지금은 골프장과 운동장으로 복구됐다).
당시 길이 31마일에 너비가 5마일(50x8km)에 달하는 지역에서 땅을 팠는데, 모든 구덩이에서 금을 발견했다는 조금은 의심스러운 소식이 1861년 6월 8일 '오타고 위트니스'에 보도되자 그해 크리스마스까지 무려 1만 4,000명이 이곳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어 노다지 찾기에 나섰다. (시들해진 미국 캘리포니아와 호주 빅토리아에서 몰려온 광부들로 1864년 2월에는 최대 18,000명에 달했다.)
그 바람에 이곳 인구는 1861년부터 1864년 사이에 400%나 늘어났으며 당시 골드 러시 열기가 잦아들던 호주에서 광부들이 대거 모여들었고, 경쟁이 심해지자 이들은 퀸스타운 인근의 숏오버(Shotover) 강변까지 채굴 지역을 넓혔다. 당시 골드 러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퀸스타운 경찰서와 법원 건물 등 지금까지 보존되는 역사적 건물이 들어서는 등 큰 마을이 생겼고, 지금도 그 흔적을 퀸스타운 인근에 위치한 관광지로 개발된 ‘중국인 정착촌(Arrowtown Chinese Settlement)’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현재 오타고에서 가장 큰 도시인 더니든은 1848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지만 골드 러시에 따른 경제적 호황으로 도시가 커졌으며 위풍당당한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한동안 뉴질랜드 최대 규모 도시가 됐으며, 1869년에는 뉴질랜드 최초로 오타고 대학이 들어서는 등 골드 러시로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
박물관은 들어가 보면 관광안내소를 겸하는데, 과도하게 관람객을 반기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시설이나 전시상태가 A급은 아니지만 나름 유물들을 소박하게 잘 보존하여 전시하고 있다. 복층으로 구성된 금 관련 시설과 당시 생활상을 보어주는 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장료는 없다.
금 관련 시설은 로렌스 타운의 골드 러시 지역의 그림, 채굴 모습과 광구의 전경, 당시 사용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인상 깊었던 것은 2층의 방 하나가 당시 로렌스 타운에 살던 사람들의 초상화와 사진으로 꾸며져 있었다는 것이다. 백여 년 전으로 돌아가 그들의 일상생활의 즐거움과 괴로움, 사랑과 우정 등이 자신들의 프라이드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규격화되지 않은 액자에는 그림이나 사진 속 인물의 이름과 생몰연도가 표시되어 있다. 간혹 무엇을 하던 분인지에 대해 알아챌만한 힌트도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이런 인류학적인 자료를 갖고 있다는 것이 주민들이 마을의 역사를 얼마나 사랑하고 선조들을 기리는 마음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아 참 부러웠다.
중국인 관련 전시
최근 뉴질랜드에 대한 중국인들의 투자아 이주가 증가하면서 남섬에서도 어딜 가나 중국 사람이고 중국말을 쉽게 드를 수 있다. 심지어 크라이스트처치 공항 안내판도 영어와 중국어만 쓰여 있다. 퀸스타운 근처의 애로우타운에 가면 정말로 중국인 2/3에 기타 나라 사람들일 정도로 많다. 하지만 아직 로렌스타운에는 중국인 관광객은 보이지 않는다.
박물관에서 중국인에 대한 전시는 나름 신경을 써서 별도의 룸에 이것저것 유물도 전시하고 있다. 여기를 거쳐간 사람도 있지만 결국은 가족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의 묘비까지도 전시되어 있다. 주로 광둥에서 온 쿨리를 중심으로 생겨난 지역 공동체가 있었다(지금도 광둥어는 4번째 많이 쓰는 언어이다). 이러한 흔적은 더니든의 전 시장이 중국계인 피터 친(Peter Chin)이라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중국인은 현재 27만 9039명(2023)이며 전체 뉴질랜드 인구의 5.3%를 차지한다. 금광 지역에서의 중국인 쿨리는 소설 <루미너리스>에 등장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뉴질랜드에서 금발견은 콜링우드 (Collingwood), 사우스아일랜드 북부 (1857)에서 시작되었다. 대규모 골드 러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금이 있다는 것에 대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에 바로 오타고 로렌스 타운의 골드 러시 (1860년대 초)가 일어났다. 그 후에는 애로우 강에서도 금이 발견되면서 애로우타운 (Arrowtown) 골드 러시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인근 크롬웰 (Cromwell), 벤디고 (Bendigo), 타라스 (Tarras) 일대 (오타고)에서도 활발한 금 채굴이 이루어졌다. 특히 최근에는 벤디고와 타라스 인근에서 40년 만에 가장 중요한 금광이 발견되기도 했다.
1860년대 중반에는 웨스트 코스트 골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1864년에 2명의 마오리가 타라마카우(Taramakau) 강에서 금을 발견하면서 역사상 ‘웨스트 코스트 골드 러시’라고 명명된 두 번째 금 찾기 열풍이 서해안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1865~66년에 브루스 베이(Bruce Bay), 오카리토(Ōkārito), 찰스턴(Charleston) 주변, 그레이(Grey) 강 하구 호키티카 (Hokitika), 그레이마우스 (Greymouth), 웨스트 코스트 (1864년경)에서 골드 러시가 본격화되었다.
1866년에 호키티카는 인구 2만 5,000명 이상에 술집만 100여 곳에 달하면서 뉴질랜드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정착지가 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사금뿐만 아니라 석영맥 금광도 개발되었다. 당시 골드 러시의 영향으로 금광 열풍이 점차 잦아지던 1867년에도 호키티카 항구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선박이 드나드는 항구였으며 9월 어느 날에는 41척이나 되는 배들이 줄지어 정박했고 금 수출로 국내 수출액 1위의 항구였을 정도였다.
1860년대 후반에는 템즈 (Thames), 코로만델 반도 (Coromandel Peninsula), 노스아일랜드 (1867년) 등 뉴질랜드 북섬에서도 금이 발견되면서 템즈를 중심으로 한 골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주로 경질암 금광(hard rock gold mining)이 발달했다.
1870년대 이후에는 와이히 (Waihi), 코로만델 반도에서 1878년에 대규모 금맥이 발견되면서 뉴질랜드에서 가장 크고 오래 운영된 금광 중 하나가 되었다. 초기에는 사금 채취 위주였으나, 이후 광맥을 따라 지하 채굴이 활발해졌다. 와이히 광산은 20세기 초까지 뉴질랜드 금 생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로렌스 타운의 와이카후나 스쿨은 골드 러시가 한창이던 1860~70년대에는 180명 이상 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Otago Daily Times, 2023년 기사). 금맥이 마르면서 당연히 사람들은 떠나가고 점점 학생수가 줄어들어 2025년 3월 현재는 3명의 학생만 재학하고 있다고 한다. 80대 중반이 넘었을 위 사진의 학생들이 아직도 건재하던 당시의 마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25년 6월 30일 대한석탄 공사의 마지막 탄광이었던 태백 도계영업소가 89년 만에 폐쇄됐다. 화순탄광(2023), 장성탄광(2024)에 이은 마지막 수순이었다. 이제 국내 석탄광은 민영인 경동산덕광업소(도계) 1군데만 남게 되었다.
탄광산업이 활황기였던 1988년 말 태백시 인구는 11만 5,175명이었다. 2025년 6월에는 3만 7,556명으로 68% 감소했다. 2024년도 태백초등학교 신입생은 1명이었고 전교생은 27명이다. 광산촌은 광물의 산출량, 산업정책에 따라 경기의 부침이 있게 마련이다. 과연 이런 현상이 광산촌에서만 일어나는 일인가 생각해 본다. 잘 나간다는 산업이나 분야, 지역으로 사람들이 쏠리고, 시들해지면 빠져나가는 것이 인간사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어딘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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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