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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가 피는 겨울아침

생활 속 과학 이야기

by 전영식

첫눈이 폭설로 온 며칠 뒤 예보와는 달리 안개가 뿌였게 끼었다. 무슨 일인가 호기심에 창밖을 살펴보니 이상하게도 일정한 구역만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지역난방관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듯한 풍경이다. 잘 보니 멀리서 동이 트고 있는 산아래 탄천을 따라 안개가 뭉게 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좌우로 살펴보니 상류 쪽부터 하류 쪽까지 마치 온천마을 개천처럼 수증기가 올라왔다. 어? 우리 동네 온천 생겼나?


KakaoTalk_20251207_102832235.jpg 탄천의 물안개 ⓒ 전영식


주섬주섬 챙겨 입고 아직 미끄러운 길바닥을 걱정하며 등산화까지 완전무장! 뺑소니차 없나 조심조심 좌우를 살피고 삼나무잎 떨어진 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본다. 탄천으로 통하는 지하도를 통과하기도 전에 이미 탄천의 안개는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보이는 것처럼 산책길과 다리에는 크레바스보다 위험한 살얼음이 덮여있다. 누가 저기에 공유자전거를 버리고 갔을까... 며칠 전 폭설로 내린 첫눈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며 냇가로 내려선다.


20251207_073947.jpg 탄천의 물안개 ⓒ 전영식


과연 탄천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탄천 주민인 청둥오리에게는 익숙한 풍경인 듯 무심하게 놀고 있다. 상류 쪽 작은 수중보 위에는 그 양이 더 많다. 대략 건물 7~8층 정도 높이다. 기온을 보니 0℃ 였다. 냇가로 내려가 물에 손을 넣지는 않았지만 분명 따뜻했으리라 오리가 알려준다.


20251207_074042.jpg 탄천의 물안개 ⓒ 전영식


안개 넘어 피안의 세계는 마치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이스트 에그와 웨스트 에그를 가르는 물안개 같다. 나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있나 모르겠다.


20251207_074623.jpg 탄천의 물안개 ⓒ 전영식


물안개는 '증발안개(evaporation fog)'의 일종으로, 수면의 온도가 공기보다 높을 때, 수증기가 공기 중에 포화되어 작은 물방울로 응결해 발생한다. 즉 겨울철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지표 근처의 공기가 매우 차가워질 때 아직 강이나 호수, 바다는 충분히 차가워지지 않아 상대적으로 따뜻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 이럴 경우 따뜻한 수면에서 수증기가 활발하게 증발하며 공기층으로 들어가는데, 차가운 공기는 머금을 수 있는 수증기의 량(포화수증기)이 작기 때문에 올라온 수증기가 미세한 물방울로 응결되는 것이다.


20251207_075134.jpg 탄천의 물안개 ⓒ 전영식
20251207_075341.jpg 탄천의 물안개 ⓒ 전영식


물안개가 피면 하천변 도로에 얇은 얼음막(블랙 아이스)이 생길 수 있다. 도로는 대기처럼 매우 낮은 온도이기 때문에 안개가 지표면에 닿으면 얼기 때문이다. 알아차리기 힘든 데다 매우 미끄러워 대형 사고의 원인이 된다. 물론 해가 뜨고 대기의 온도가 올라가면 안개도 블랙아이스도 사라진다. 그래도 응달진 도로, 북향의 도로 등에선 충분히 감속을 해야 한다.


이터널 선샤인.jpg 제공: 롯데컬처웍스(주)롯데시네마, ㈜노바미디어, 코리아픽처스

미셀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e Mind)>(2004)는 기억과 사랑,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담은 독창적인 로맨스 영화이다. 헤어진 연인 조엘(짐 캐리 분)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하며 시작된다. 조엘은 기억을 지워주는 '라쿠나' 사의 시술을 받던 중, 삭제되는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안개는 시야를 가려 명확한 인식을 방해하는 것처럼, 조엘의 기억이 점차 모호해지고 사라져 가는 과정을 안개처럼 시각화한다. 호수 위 안갯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지만, 기억이 지워지면서 관계의 선명함도 흐릿해진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로 들어서는 계절에 안개로 시작한 날에 볼만한 영화다.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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