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공화(夢幻空華)를 하로파착(何勞把捉)가
#20231022 #자살 #회향 #색즉시공 #인연생기
작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종합격투기 천재가 있었다. 그의 언니가 최근에 밝히기를,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도 2017년 타이틀 방어전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사실은 자해였다고 했다. “패배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시합 때에 맞춰 체중을 감량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라고 한다.*1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WHO 통계로 2019년 기준, 인구 10만 명 당 21.2명으로 12위, OECD 통계로 2020년 기준, 인구 10만 명 당 24.1명으로 1위이다.*2 출산율은 꼴찌에 자살률은 1위인 나라.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회학자 E. Durkheim은 자살을 크게 3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었다. 이기적(Egoistic), 이타적(Altruistic), 무규범적/무통제적(Anomic). 이기적 자살은 어떠한 사회 집단에도 강하게 속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사회적 유대가 끊겨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지지를 잃음으로써 고립감, 소외감에 빠진다. 기혼보다 미혼이, 시골보다 도시에서 더 많은 자살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이타적 자살은 사회 집단과 지나치게 융화된 사람들 중 그 사회를 위해 희생할 목적으로 하는 자살이다.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 자살 폭탄테러 등이 이에 속한다. 무규범적/무통제적 자살은 사회가 무규범 상태가 될 때 그러한 혼란 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이다. 급격한 사회변동, 경제 위기 등에서의 자살이 그 예시다.*3
창조물이 자살한다는 건 창조주의 뜻인가, 창조주의 뜻을 벗어난 것인가? 전자라면 창조주는 왜 창조물이 자살하게 만드는가? 후자라면 창조주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지. 창조주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있으면 안 되잖아? 그럼 결국 자살하는 것도 창조주의 뜻이라는 건데 아, 이 우매한 중생의 머리로는 신의 뜻을 알 수가 없구나. 근데 신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고통만 허락하시는 거 아니었어? 결국은 내 믿음이 부족해서구나! 하지만 모든 걸 신의 뜻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무지를 신으로 대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4
불교에는 회향(廻向)이라는 단어가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회향은, 지금의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 있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 부모님, 형제자매, 친척들, 선생님들, 밥집 직원분, 학원 선생님들, 친구들, 선배와 후배들, 옷 만드는 사람들 등등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니, (적어도) 받은 만큼 세상에 돌려주는 것이다. 특별히 어디를 가거나, 뭔가를 더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본인이 맡은 역할에 충실히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하게 되면 받은 것을 돌려주지 못하고 끝나게 되므로 그만큼 죄를 짓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영원한 1등은 없다. 그 1등 또한 나이를 먹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에게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 한 번 핀 꽃은 질 수밖에 없고, 만들어진 것은 망가지고 부서지기 마련이며, 태어난 것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삶이 허무하다고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시작이 있는 것에는 언젠가 끝이 있다는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들이지만, 마치 내게는 죽음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산다. 그래서 전도서에는 자꾸 일깨우기 위해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으며,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5라고 되어 있나?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중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 항상(恒常)함이 없으니(無), 어느 것에도 애착·집착하지 말고, 매이지 말고 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돈, 명예, 직업, 인간관계, 생각, 학문, 물건, 회사, 집, 재산, 건강 등 생각할 수 있는 것 모두가 계속해서 변한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신심명信心銘에는 ‘몽환공화(夢幻空華)를 하로파착(何勞把捉)가’라는 구절이 있다.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반야심경般若心經에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게 사라진다고 해서, 허망하다고 해서 막살면 안 된다. 이 세상은 공(空)하지만 존재한다. 안 먹으면 배고프고, 꼬집으면 아프고, 피곤하면 자야 하고, 살려면 돈도 벌어야 하고, 사람들하고 관계도 맺어야 한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다른 종교는 어떻게 설명하는지 모르지만, 불교에서는 인연생기(因緣生起); 인연(因緣); 연기(緣起)로 설명한다. 지금 내 직업, 지금 내 주변 사람들, 지금 내 상황. 지금의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은 과거 생의 언제인지는 몰라도 인(因)을 지어놓았던 게 지금 연(緣)이 닿아서 받는 것이니 잘 풀어야 한다는, 그리고 지금 인(因)을 잘 지어놓아야 미래에 좋은 연(緣)으로 만날 거라는. 인과응보(因果應報); 과보(果報);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셋 다 같은 말이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결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받는다고 하셨다. 그러니 받은 만큼 세상에 돌려주지 않고 가면 그에 대한 과보를 미래 생에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지만 모든 게 허망하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왜? 살아야 하니까.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사람들하고도 잘 지내야 한다. 다만 그렇게 하면서, 어느 것 하나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 돈, 명예, 직업, 상황 등등은 내가 (과거 언젠가에) 지어놓은 대로 올 뿐이다. 오면 오는 대로 잘 해결하고, 또 잘 지어놓고. 이런 것을 끝도 없이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고 죽는 문제를 그만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해본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돌연 세상 떠난 '18살 종합격투기 천재' 이선희 양, 충격적인 사망 원인 밝혀져>, 2023.09.21., https://www.insight.co.kr/news/450763
2023.09.20. https://mothership.sg/2023/09/angela-lee-on-victoria-lee-death/
*2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국제 자살통계, https://kfsp-datazoom.org/international01.do
OECD statistics, https://stats.oecd.org/, Health>Health status>Cause of mortality>Intentional self-harm
*3 Benjamin J. Sadock et al., Kaplan & Sadock’s synopsis of psychiatry: Behavioral sciences/Clinical psychiatry 11e, LWW, 2014, 766p
*4 Carl Sagan, 『코스모스』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328p. 인용(引用)의 인용이다. 폴 하인리히 디트리히 홀바흐 남작, [자연계], 1770년
*5 전도서 7:4(코헬렛 제7장 4절)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
전도서 7:2(코헬렛 제7장 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http://www.holybible.or.kr/cgi/biblesrch.php?BA=0&OD=0&DL=5&VN=21_&QR=%C1%FD%BF%A1
전도서 1:2(코헬렛 제1장 2절)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8(코헬렛 제12장 8절)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