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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Nov 21. 2023

악마의 대변인

역행보살(逆行菩薩)

#20231121 #악마의대변인 #역행보살


 D의 회사에서는 매주 회의를 하는데, 회의가 매번 똑같이 흘러가서 참석하기가 싫다고 한다. 부장이 안건을 내면 과장이 반박하고 딴지 걸고, 다른 부장이 안건과 관련 없는 딴소리를 하고, 결국 해당 안건에 대한 뒤처리는 막내들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회의도 같은 순서의 반복. 제일 짬이 낮은 D는 ‘제일 막내’라는 이유로 짬을 피해 가고 있었지만,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대화들이 오고 가지 않는, 흘러가는 대로만 흘러가는 답답한 회의라면 나도 참석하기 싫을 것 같았다. 


 매번 딴지를 건다는 부장 얘기를 듣고 보니,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이 떠올랐다. 일부러 성인(聖人) 후보자의 결격 사유를 찾아 반대 의견을 내는, 추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존재이다. 후보자의 트집을 잡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후보자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한다. 토론에서도 토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일부러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존재라고 한다. 어쩌면 그 부장은 매번 반복되는 회의에 불을 지피기 위해(누군가가 불을 질러주길 바라면서) 계속 반대되는 의견을 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만 그 불을 지른 사람은 자신이 지른 불에 대한 책임을 져야겠지만. 해당 안건을 책임진다든가) 


 불교에는 역행보살(逆行菩薩)이라는 개념이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역행보살은 상대를 바른길로 이끌기 위해서 나쁜 역할을 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 보살이다. 상대의 수준을 명확히 알고, ‘내가 여기서 상대에게 이런 역할을 하면 상대가 바른길로 갈 수 있겠구나’까지 다 알고 있어야 가능한 역할이다. (이 정도 수준의 보살이라면 업 자체가 공(空)하다는 것을 알아서, 상대를 위해 악업(惡業)을 짓고 그 과보(果報)도 다 받으면서도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턱대고 상대를 괴롭히고 나서 ‘내가 상대를 위해서 이렇게 했다’라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괴롭힘을 당하는 쪽이 ‘아, 저 사람이 내 역행보살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건, 본인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바른길로 가겠다는 거니까 성숙한 태도가 아닐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나, ‘고통은 성장의 밑거름’ 같은 말들도 다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 

https://ko.wikipedia.org/wiki/%EC%95%85%EB%A7%88%EC%9D%98_%EB%B3%80%ED%98%B8%EC%9D%B8

https://en.wikipedia.org/wiki/Devil%27s_advo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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