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정진, 아상, 하심, 자유, 무심
#20240523 #영혼 #정진 #아상 #하심 #자유 #무심
# 찻길 위에서는 어떤 형태로는 차(車)라는 것에 타야 한다. 승용차, SUV, 스포츠카, 오토바이, 자전거 등등... 차도(車道)라는 시스템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매트릭스라는 시스템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의 정신을 프로그램의 형태로 업로드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생명체에 담겨야 한다. 차도 위의 차들의 모습이 다양한 것처럼 생명체의 모습도 다양하다. 종이 아예 다르기도 하고, 같은 종 내에서도 생김새가 다르기도 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의 영혼은 아주 운이 좋게, 다른 동물에 비하면 머리가 좋은 ‘인간’에 담겨 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밖에 보지 못한다. 차로 따지면 차의 외형만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 안의 운전자나 내부 기능들은 알 수가 없다. (차의 내부 기능은 사람으로 치면 정신기관(psychic apparatus) 같은 거려나?)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차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운전자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상대의 행동과 말을 보고 그 영혼의 크기나 깊이를 짐작한다.
# 우회전을 하기 위해서는 제일 오른쪽 차선에 끼어들어야 하는데, 이 끼어드는 타이밍이 참 중요하다. 언제 끼어드냐에 따라서 좀 더 빨리 가느냐 마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순간의 선택’, ‘선택의 중요성’이란 말이 떠올랐다. 쫄리지만 더 앞에 가서 끼어드느냐, 좀 늦게 가도 안전하게 뒤에서 미리 줄 서 있느냐.
그리고 중학생 때 학원가로 걸어가면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게 특목고를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가는 거라고, 특목고 입시는 그 사다리(계층 간?)를 건너는 시험이라고. 그게 날 더 성공과 행복에 가깝게 해 줄 거라고. 그때는 그게 그렇게 중요했었다.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특목고를 간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과 직결되는 건 아니었다. 인생의 길은 다양하고 각자 느끼는 성공과 행복은 다 달라서, 어느 길을 걷느냐 마느냐는 길게 보면 큰 의미가 없는 듯하다. 더 중요한 건, 목표를 잃지 않고 그것을 향해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걸어가는 것.
# 운전할 때 여유가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속도에 편히 맞춰줄 수 있다. 앞차가 천천히 가든, 느리게 가든 상관이 없다. 마음이 바쁜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자기 것(여기서는 속도?)을 고집해야 하는 사람, 빨리 가야 하는 사람은 앞차가 왜 이렇게 빨리 안 가냐고 재촉하겠지.
마음이 넓은 사람과 좁은 사람의 차이가 이것일까? 마음이 넓고 좁은 것도 상황에 따라서 계속해서 변하겠지만. 깨달으신 분은 마음이 없으니(無心) 상대에게 다 맞춰줄 수 있으시겠지. 못 깨달은 존재는 자기가 걸려있는 부분에서 자신의 것을 고집할 거고. 내 것을 고집한다는 것에서 아상(我相)의 얘기이기도 하다.
# 세차할 때 보니, 차 앞쪽에 벌레의 흔적들이 많이 있었다. 내 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딪혀 죽어간 벌레들의 사체다. 언젠가 빨간 피가 돌며 살아 숨 쉬었을, 그러나 이제는 까맣게 타서 말라비틀어진 그것들을 보면서, 내가 살아오면서도 주변에 이런 피해들을 주면서 살지 않았을까 싶었다. 당장 내가 먹는 밥만 해도 살아있던 식물을 채취하거나 살아있던 동물을 잡아서 먹는 것이니까. (‘의학 교과서는 사람들의 수많은 죽음 위에 만들어진다’라는 표현도 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미안함과 고마움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시속 70km 구간단속 구간에서 나는 단속 직전에 다른 길로 빠지기에 단속에 대한 부담 없이 마음대로 달렸다. 다른 차들을 제치고 앞으로 달리니 우월감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하니 이건 여전히 ‘제한속도’라는 기준과 ‘차’라는 것에 매여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구간단속 구간에서 속도 제한과 상관없이 빨리 간다고 우월감에 좋아할 게 아니었다. 애초에 차가 아니었다면, 예를 들어 비행기였다면? 구간단속을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
속도가 빠르고 느리고를 이 세상에 비유하면 어떻게 될까? 힘이 세고 약하거나, 머리가 좋고 나쁘거나 등등이 되겠다. 근데 이건 ‘이 세상’, ‘이 우주’에서의 얘기다. 힘이 아무리 세고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우주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애초에 우주를 벗어나면 힘이 세고 머리가 좋은 것은 의미가 없어지는데? 영화 <매트릭스>에서 요원(agent)들의 능력이 매트릭스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the one)의 능력은 매트릭스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머리가 좋은 것과 깨달음은 아예 다른 얘기다. 머리가 좋은 건 이 우주 내에서의 얘기다. 이 세계는 상대적이니까 언제든 머리가 더 좋은 누군가가 나타난다. 지혜나 깨달음은 이 우주를 벗어나는 것을 얘기한다. 똑똑한 것도, 어리석은 것도 다 업(業)이라는 부처님 말씀이 떠올랐다.
이 세상은 나고 죽음이 반복되는 곳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팔고(八苦)*를 설하셨고, 거기에 생(生)과 사(死)가 있다. 태어나고 싶지 않아도 지어놓은 업(業) 때문에 태어날 수밖에 없고, 태어난 이상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중생(衆生)이다. 우주 자체가 언젠가 생겨났고 또 언젠가는 사라질 텐데, 그 안의 것들이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죽어도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 갇혀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무한한 지옥이 아닌가?
그렇다고 ‘힘을 얻거나 똑똑해져도 소용없다’라고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을 살려면 당연히 힘도 많고 지식도 많아야 한다. 다만 ‘그것들에는 한계가 있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 팔고(八苦): 생(生, 태어나고 싶지 않아도 태어남), 로(老, 늙고 싶지 않아도 늙음), 병(病, 병들고 싶지 않아도 병들음), 사(死, 죽고 싶지 않아도 죽음),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나 얻을 수 없음),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나 이별할 수밖에 없음), 원증회고(怨憎會苦, 원망하고 증오하지만 만날 수밖에 없음), 오음성고(五陰盛苦, 몸이 있어서 오는 괴로움)
# 아파트 입구에 가까운, 혼자 넓게 댈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주차했는데 출근하기 위해서 차를 빼야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천년이고 만년이고 그 자리에 차를 대고 있을 수도 없고, 언젠가는 차를 움직여야 하니까. 이번에 운 좋게 댔던 것처럼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겠지.
지금 똑똑하고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도 마치 내가 한때 좋은 자리에 차를 댄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었다. (과거 언젠가의 자신이 인(因)을 잘 지어놓아) 현재 연(緣)이 닿아 잘/많이 갖게 되었지만, 영원히 가지고 있을 수는 없는 것들. 그러니 자신이 순경(順境) 속에 있는 것 같다면,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또 거길 떠나거나 보내줘야 할 때는 미련 없이 떠나고 보내주는 것. 더 좋은 인(因)을 지어놓으려고 노력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