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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Jun 19. 2024

그냥 하는 것

꾸준함, 정진(精進), 그리고 무두한(無頭漢)

#20240619 #정진 #무두한 


 친구 Y의 처남댁은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그냥 한다고 한다. 학생일 때는 공부해야 하니까 공부하고, 직장인이 되어서는 일해야 하니까 일하고, 심지어는 게임 퀘스트까지도 알람을 맞춰가면서 열심히. 뭐든 해야 하면 묻고 따지고 더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는 사람. 왜 이걸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한다고 한다. 나는 그게 부러웠다. 어디선가 본 무두한(無頭漢)*1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꾸준함’과 ‘중꺾그마(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 40화에 나영석 PD가 나와서,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대중문화 스타가 있냐는 질문에 강호동을 언급했다.*2 예전에는 대단한 사람이 대단해 보였는데, 요즘은 오랫동안 꾸준한 사람이 대단해 보인다고 했다. 

 저렇게 많은 부침(浮沈)도 있고 힘든 시간도 있었을 텐데. 자기 자신의 힘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까? 아, 나도 참 저렇게 되고 싶다. 


 또, 2020년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남자 조연상을 수상한 <동백꽃 필 무렵>의 배우 오정세는 수상 소감*3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이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다 다르다는 건 신기하고, 또 그러다 보니 자신이 잘해서 결과가 좋은 것도/망한 것도 아닌 것 같다’라고 했다. 꿋꿋이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결과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불공평하다 싶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거나 지치지 말고포기하지 말고무엇을 하든 간에 그 일을 계속했으면 좋겠다고그냥 계속하다 보면 어느 날에 그간의 위로와 보상이 찾아올 것이라고 그랬다. 


 가수 이석훈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모 인터뷰*4에서 이석훈은 자신의 재능이 애매하다고 생각해서 연습만 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모 예능에 나가면서 주목을 받고 하면서 이것저것 해보고 있다고. 그냥 연습하고 있으면 기회가 왔을 때 자연스럽게 앞으로 갈 수 있더라고. 자기도 몰랐는데 자신은 도전적인 사람이었고, 이제 새로운 도전이 와도 두려움은 없다고. 


 2022년 말, 가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곡이 차트 역주행을 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모 라디오의 인터뷰*5에서 윤하는 남의 일이라서 되게 커 보이겠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작은 성과들이 쌓여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큰 성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그렇지만 그 작은 성과들이 없다면 한 번의 잭팟은 없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가수 윤종신은 월간 윤종신을 통해 매달 곡을 낸다.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과의 인터뷰를 통해서*6 윤종신은 마케팅을 덜어내면 꾸준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한 달에 하나씩 노래를 내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2010년부터 지금까지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이미 한 것은 창작적 배설물이고자신은 앞으로 하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노래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g.o.d.의 <촛불 하나>에서는 사는 게 힘들기만 하고 삶이 이겨내야 했던 고난들만 주었지만, 주저앉으면 안 된다고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내가 너의 손을 잡아주겠다고 한다. 만화 <디지몬 어드벤처>의 오프닝 곡인 <Butter-Fly>에서는 ‘그래그리 쉽지는 않겠지’라면서 내게 주어진 세상이 편하지도, 감미롭지도 않고, 평화롭고 희망찬 시간도 아닌 걸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날아오를 거야’라면서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날갯짓뿐이지만, 거기에 꿈도 담고 힘도 담을 거라고,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다. 




 비단 연예인들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 듯하다. 화가 고흐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 이런 내용들이 있었나 보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1882.01.07.~08 


 찾아보니 고흐는 고작 10년 활동한 화가였다. 그 10년 동안에 2천여 작품을 그렸다. 그리고 37세로 사망했다. 남들이 평생에 걸쳐, 아니 어떤 이들은 평생 생각하지도 않을 것들을 그는 짧은 시간에 고민하고 고뇌하고 괴로워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걸 이겨내고 표현하려고 애썼던 거 같다. 그가 나름대로 내린 답, 그리고 답을 내리지 못한 질문들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어쩌면 요절한 천재라는 사람들은 그런 질문들을 남기고 가는 존재들이 아닐는지? 


 우리는 노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을 팔지 못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일이 우리 다음에도 계속될까 두렵다. 1888.08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누군가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언제쯤 그릴 수 있을까?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1888.09.03. *7


 해가 갈수록 점점 좌절하는 게 보이는 듯해 안타깝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동굴을 끝없이 걸어간다고 생각하면 그의 괴로움이 어땠을지 가늠이 안 된다. 역경만이 계속된다고 느낀다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이겨내기 힘들었을까? 괴로움의 바다에 행복이라는 섬은 아주 간혹 있는 건 아닐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고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것이, 하루하루를 온전히 견뎌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을지. 몰아치는 현실에서 해야 하는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하기란 참 어렵다. 




 어제 운동장을 뛰었다. 걸어서 1바퀴, 뛰어서 3바퀴, 다시 걸어서 1바퀴, 다시 뛰어서 1바퀴, 앉아서 쉬고, 걸어서 1바퀴, 뛰어서 1바퀴. 오랜만에 뛰어서 그런지 매우 숨이 찼다.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잘 뛰는 거지? 나는 간간이 스퍼트를 냈는데스퍼트 이후에 숨이 차서 걷고 있으면 내가 아까 앞질렀던그냥 평범하게 뛰던 사람들이 다시 나를 추월한다가끔 마음을 내서 한꺼번에 하는 것보다 꾸준하게 조금씩 하는 게 더 멀리, 길게 봤을 때는 더 빨리 가는 것 같았다. 



 

 여행을 간다고 장거리 비행을 한 적이 있다. 비행기 좌석 패드에 3D 지도가 보여서 중간중간 어디쯤 왔나 확인했다. 그냥 목적지까지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처음에는 인천에서 프라하까지 일직선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당장 인천에서 이륙할 때부터 방향이 달라졌다. 중간중간 확인해 보니 비행기는 때로는 왼쪽으로 때로는 오른쪽으로 꺾으면서, 그래도 전체적인 방향은 잃지 않은 채 우리를 목적지까지 잘 데려다주었다. 도착할 즈음에 보니 꽤 둘러왔다. 


출발할 때는 일직선으로 보였지만, 도착할 때 보니 둘러서 왔다 


 우리네 삶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각자 목적지도 다를 거고, 또 목적지까지 곧바로 갈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당연히 그럴 수만은 없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목적지를 까먹지 않고 한 발씩 나아가는 것.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 있는 것. 그러니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저앉을 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하루하루 성실하게 한 발씩 내딛는 것. 정진(精進). 그리고 무두한(無頭漢). 



References) 

*1 [삶과 영혼의 비밀] 일부 발췌, https://m.blog.naver.com/ysnskch/220848026069 

 ... 현자들에게는 진실한 마음만이 통한다. 머리 쓰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사람은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고 하여 무두한(無頭漢)이라고 한다. 머리를 굴리지 말아야 한다. 머리를 굴리는 사람은 수행을 하지 못한다. 수행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 


*2 [#유퀴즈온더블럭] 나 PD의 최초 심경 고백() 나영석 연봉 기사 보자마자 큐대 내려놨다는 이우형피디ㅋㅋㅋ, https://www.youtube.com/watch?v=-V7oCYiBccA, 12:10~13:55 


*3 2020년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남자 조연상, <동백꽃 필 무렵>의 배우 오정세 수상 소감

https://www.youtube.com/watch?v=LmgWxezH7cc

[#라디오스타] 남희 코픠 한잔 하까?☕ 예능 열정캐로 돌아온 라스 출신 예능 보석 김남희�ㅣ#김남희 MBC240515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yclkf6MxNtE, 11:37~


*4 [ENG]위기의 이석훈? 나한테 이런 질문한 사람은 처음이야! | 썰플리 | 아주 사적인 미술관 EP.02 / 14F 

https://www.youtube.com/watch?v=VW7q0sYNSLU, 13:06~


*5 CBS 김현정의 뉴스쇼 2022.12.30. 가수 윤하 인터뷰, 

https://youtu.be/JYP0tE-q43Q?si=MPerz06eP-mJGhQf&t=1574, 26:14~ 


*6 윤종신, 송길영 인터뷰.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 

https://www.youtube.com/watch?v=2zAvsHWIkiI, 03:20~ / 05:10, 배설물에 비유. 

https://www.folin.co/article/5903


*7 지식채널 e. 1882년 <테오에게> 1, 2부 

 지금처럼 조용히 싸움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작은 창문 너머로 평온한 풍경을 바라보고 신념으로 그리는 싸움 말이다.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니? 1882 


이건용, 달팽이걸음 - 

https://www.youtube.com/watch?v=Oh4nNpgf0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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