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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하다가 1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이란

by 초이

#20250625 #샤워 #마음 #흔적 #행 #업


나는 샤워하고 여기저기에 튄 물을 쓸어낸다. 언제부터였을까? 엄마는 샤워하고 나면 다 쓴 수건으로 거울에 찬 습기를 닦고 나오라고만 하셨었다. 아마 절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면 물을 쓸어내는데, 엄마 아빠가 그걸 보신 이후부터 우리 집 화장실 물 쓸기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하시니까 나도 한다. 물을 쓸어내는 건 기분이 좋다. 뭔가 내가 행동한 흔적이 명확하게 남고(물을 쓸어낸 길이 남으니까), 물기도 없어지고, 빨리 마르고, 미끄럽지도 않다. 벽에 튄 물도, 샤워기 뒤쪽이나 샴푸 통 주변도 쓸어낸다. 욕조의 틀과 옆면과 바닥을 쓸고 마지막으로 화장실 바닥을 쓸어낸다.


샤워하고 나면 고이는 물과 머리카락. 그것은 내가 샤워(行)를 한 흔적(業)이다. 물을 쓸어내는 건 그 흔적을 지우는 일이다. 흔적이 남는 것이 어디 샤워뿐일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흔적을 남긴다. 어떤 형태로 남기도 하고, 누군가의 마음에 남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 마음에 가장 크게 남는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고 했던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이란.


샤워실을 ‘마음’, 샤워를 ‘행동’이라고 한다면, 물기를 쓸어내는 건 어떤 행동을 하고 남은 마음을 치우는 일이다. 마음을 내서 행동하고 나면 마음이 깔끔하게 사라져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어딘가에 집착해서 조금씩 남는다. 뭔가를 ‘했다’라는 생각, ‘내가 했다’라는 생각, 감정(뿌듯함, 후회, 불안 etc.), 행동 자체 등등.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내 마음과 행동과 결과 또한 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들인데, 이걸 머리로만 어렴풋하게 느끼고 명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자꾸 남는 것이다. 샤워실에 물기가 남으면 미끄럽고 불편한 것처럼 마음에 뭔가가 남으면 거기에 매여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물기를 쓸어내는 것처럼 남은 마음도 쓸어내야 하는데.


간혹 J가 샤워를 하고 나서 물기를 안 쓸고 나올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J가 남긴 마음을 치운다고 생각하고 대신해서 물을 쓸어낸다. J가 남긴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의 마음으로 먹는다.


절에서 발우공양을 한 뒤에 단무지나 두부로 그릇에 남은 양념을 닦아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음식을 남기지 않겠다, 상대에게 받은 것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깨끗하게 비운 발우처럼 마음을 열심히 쓰고 나서 어떠한 애착이나 집착도 남기지 않겠다는, 깨끗하게 비우겠다는 표현이 아닐까? 스님들이 발우를 깨끗하게 닦는 것처럼, 나는 오늘도 물을 쓸어낸다. 물론 밥그릇도 깨끗하게 비운다. ^^

ChatGPT Image 2025년 6월 24일 오후 03_49_53.png 깨끗한 발우. 요즘 chat GPT는 그림도 잘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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