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我相)
#20260107 #샤워 #아상
샤워를 하면 물이 여기저기 튄다. 샤워기에서 나온 물이 내 몸에 부딪혀서 여기저기로 튀는 것이다. 물이 지나가는 길에 내 몸이 없었다면 튀지 않았을 것이다. 몸이 없었다면 물은 그냥 쏟아지는 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흘러갔을 텐데, 내 몸이 있었기 때문에 부딪혀서 벽에도 튀고 바닥에도 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없으면 걸릴 게 없는데, 내가 있으니까 걸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불쑥불쑥 올라오는 마음이 그렇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나’를 위한 것들이다. 당연한 일이다. 일단 살아야 하니까 ‘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지. 근데 거기서 ‘나’를 포기하면 부딪히지 않는다. 상황을 좀 더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다.
내가 있어서 물이 튄다. 내가 없으면 물이 튈 일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없다’라는 건, '나 하나 없어지면...'의 의미가 아니다. 내가 없다는 건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나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꾸 나를 내려놓다 보면 나중에는 일어나지도 않게 된다. 같은 상황에서도 걸림이 없게 된다.
차갑다고 난리 칠수록 더 많이 튄다. 결국은 내가 쓸어야 하는데. 차분하게 받아들여야 치울 게 적다. 괴롭다고 떨면 치울 것만 더 많아진다.
물을 내가 무수히 심어놓은 인(因)으로 보고, 나와 부딪히는 것을 연(緣)으로 보고, 물이 튄 것을 드러난 인연에 내가 반응해서 새로 지은 업(業)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새로운 업을 많이 남기기보단,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가능하다면 좋게 남기는 게 낫지 않을까?
더 수준이 높아지면 나만 없는 게 아니라 물도 없다. 나도 변하고 물도 변하고 다 변한다. 이런 경지가 되면 따뜻한 물이든 찬물이든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다. 이게 수연행(隨緣行)*인가 싶다.
* 이입사행(二入四行): 선종에서 이치와 일치하는 경지 및 보원행 · 수연행 · 무소구행 · 칭법행을 의미하는 불교 교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