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 Jan 17. 2021

나를 봐주세요

관심의 또 다른 이름

#20210116 #관심 


 또 인스타 스토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다른 사람 거냐고? 아니다. 내 스토리다. 누가 내 스토리를 봤는지 보는 거다.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남는다는 걸 알고 나서는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스토리가 게재된 하루의 시간 동안 몇 명이나 봤는지, 누가 봤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거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서도 비슷한 습관이 생겼다. 브런치에는 얄궂게도 통계라는 메뉴가 있어서, 어떤 글을 사람들이 많이 봤는지, 어떤 매체를 통해서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거다. 


 지지난 주말에 EBS에서 영화 「트루먼 쇼」를 방영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하루 2~3명이 드나들 뿐인 내 브런치에 하루 만에 40명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다. 놀랍고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 글이 뭐라고 보고 갔을까. 사람들은 내 글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인터넷에 「트루먼 쇼」 리뷰 같은 건 널리고 넘쳤을 텐데. 


고맙습니다, 「트루먼 쇼」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나는 약삭빠르게도, 그런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명한 영화에 대한 리뷰를 쓰면 어떻게든 사람들이 들어오겠구나.’,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지겠구나.’ 그런 생각으로 영화 「인셉션」에 대한 글을 쥐어 짜냈는데, 1주일째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꿈으로 무의식에 다가간다는 멋진 주제에다가, 프로이트도 언급하는 소위 “있어 보이는 글”을 쓰고자 했는데, 글이 써지지 않는다. 「인셉션」이라는 영화는 멋지지만, 내게 주제를 끌어낼 능력이, 끌어낼 재료가 없음에도 글을 쓰고자 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실은 그렇게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 감명받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쓰고자 해서 그랬을까. 글이 써지지 않아서, 그런 글을 쓰고 올릴 수 없어서 나는 괴로운 일주일을 보냈다. 

「인셉션」 리뷰는 언제쯤...?




 인스타나 브런치나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어떻게든 ‘나’를 드러내려는 것. ‘나를 봐주세요.’ 그 매개가 사진인지, 아니면 글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글을 쓰는 것이 사진을 찍는 것보다 시간도 더 들고, 생각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사진 하나를 찍기 위해서 물건의 상태나 배치를 고려하고, 어딘가에 찾아가고, (바디 프로필처럼)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사진 하나 찍는 데에 그렇게 노력해 본 적이 있나?’ 하늘 사진은 순간을 담을 뿐이다. 물론 그 순간에 사진의 수평이 잘 맞았으면 하거나 밝기를 조절해서 몇 번 더 찍긴 하지만. 


 스토리를 본 사람의 숫자, 내 브런치를 다녀간 사람의 숫자, 게시물의 좋아요 숫자... ‘나를 봐주세요.’ 결국은 누군가의 관심을 바라는 거다. 그런 숫자에 매달리는 내가 이상한 걸까. 이런 걸 고민하는 이유는, 그렇게 사진/글을 올려놓고 신경 쓰는 내가 싫어서 그렇다. 관심을 받기 위해서 올리는 사진/글이라니. 올려놓고 ‘볼 사람은 보든지.’ 하는 마음은 무언지. 그러면서 누가 보는지 신경 쓰는 건 또 무언지. 확실하게 관심을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가끔 올리면서, 관심을 받지 못하면 우울하고, 이도 저도 아닌 이게 뭔지. 그런 거 없이, 사람은 홀로 온전할 수 없는 건지. 


 그런 이유로 병원에 오는 환자들도 있다. 친구, 애인, 배우자와의 관계가 잘못되어서 괴로워하는. 그들은 안정된 애착과 관심이 필요한데, 실은 누구나 다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지 않나? 인격장애의 진단기준에는 “내적 경험과 행동의 지속적인 유형이 개인이 속한 문화에서 기대되는 바로부터 현저하게 편향되어 있는 지속적인 유형”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내가 인격장애가 아닌 건 문화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없느냐의 문제일까.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거나, 페이스북, 싸이월드, 브런치에 감성적인 글을 쓰는 것은 문화적으로 적응적인 방법이니까 괜찮은 걸까? 


 Harlow의 원숭이 애착 실험에서 갓 태어난 원숭이는 젖이 나오는 철사 어미가 아닌, 젖이 나오진 않지만 헝겊으로 된 어미를 택한다. 헝겊 어미의 따뜻함은 실은 새끼 원숭이 자신의 체온으로 만든 것이지만, 어쨌든 생존에 있어서 젖뿐만이 아니라, 따뜻함; 애착 or 관심도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에릭 번의 「심리 게임」에 의하면 사람들이 교류하는 것도 스트로크(stroke)를 얻기 위해서라는데. 오늘도 나는 올려놓고 부끄러울 글만 이렇게 남긴다. 또 며칠은 좋아요 수나 통계를 들여다보고 있겠지. 그게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면 조금 받아들이기 쉬우려나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