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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Feb 19. 2021

나의 글 쓰기 2

내가 글을 쓰는 이유

#20210219 #글쓰기 #'나'알아가기


 요새 SNS에, 내가 그런 사람들을 팔로우해놔서 그런지는 몰라도,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쓴 글들이 많이 보인다. (그림일기 포함) 소소한 일상이나, 있었던 일, 자신이 느낀 것, 반려동물 이야기까지. 그리고 나만 거기에 공감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좋아요 나 하트를 누른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 있게 드러낸 그들의 용기가 부럽다. 대체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을까? 작가는 아무 글이나 던져놓으면 되고, 나머지는 독자들의 공감에 달렸을까? 아니면 작가가 독자들의 무의식 어딘가를 건드리려고 작정하고 써야 할까? 


 나도 무언가를 많이 쓰기는 한다. 하지만 남에게 보일 만한 무언가는 아니다. 용기의 문제도 있지만, 너무나 개인적이라 공감받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가 크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처럼,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지만, 너무 개인적인 글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상에 갇힌 작품이 되고 만다. 개인적인 경험/생각을 어떻게 여러 사람이 공감할 수 있게 풀어놓느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실은 내 글의 주제는 주로 ‘나’이다. 특정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했는지, 왜 그 생각이 그때 떠올랐는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등이 주요 주제이다. 글쓰기 시작한 초반의 글들은 정신과 질환의 증상이나 진단, 정신과라는 학문에 대한 고민, 정신의 성장 등에 관한 짧은 글이었는데, 의국에서 정신분석에 관한 여러 이론을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과거나, 나의 행동/생각에 대해서 쓰게 되었다. 예전에는 ‘나’에 관한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서, 어딘가에 적지 않고는 못 배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어느 카페에서, 무언가를 한참 쓰고 나서야 머리가 비워지고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그때는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쓸 때였고, 쓰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머리를 스친 생각들이 날아가 버릴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서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의 펜시브(Pensieve)가 실재하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렇게 쓰인 글들은 너무 개인적이라 어디다 공개할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도 아니고, 유명하지도 않아서 내 삶에 관심을 보일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브런치에 올리는 글보다,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스프레드시트에 쓴 글이 훨씬 더 많다. 브런치에는 [나를 봐주세요]라며 글을 올리고는 남에게 보이지 않는 글을 더 많이 쓰고 있지만, 나는 그런 글들을 계속해서 쓸 예정이다. 나는 글을 통해서 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 대한 글쓰기를 통해서 이 세상을 보는 도구인 ‘나’라는 사람이 어떤 틀, 한계, 생각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글에도 썼지만, 글을 쓰면서 내가 알아차린 건 주로 내 그림자(라고 생각하는 것)였다. 내가 뭘 회피하고 있었는지, 어떤 소망이 숨겨져 있었는지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머리가 좋지 않아서 있었던 일을 잘 까먹는데, 글을 쓰다 보니 내 행동이 반복되거나, 비슷하게 느꼈던 부분을 알 수 있었고, 그걸 짜 맞추면서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에 대한 논리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면서 mindfulness 연습했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생각할 수 있었고, 당시의 상황을 나름대로 다시 구성해보기도 했다. 그게 mentalization이었다. 


내가 사용하는 스프레드시트. 나에 대한 이야기의 키워드는 '나의 dynamic'이다. 이걸 이용하면 빠르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주변 사람, 주변 상황에 대해서 자신이 볼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볼 수 있다. 감당할 수 없으면 불안해지기에, 그렇게 하도록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사람 나름의 방어기제가 발달한다. 내가 생각하는 정신치료(Psychotherapy)는 한 개인이 보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담자와 상담자가 함께 알아가는 과정이다. 내담자가 상담자라는 자극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이다. 나도 개인 분석을 받아보고 싶지만, 우선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보려고 한다. 내가 ‘나’에 대해서 주관적이자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을 조금씩 넓혀가는 거다. 왜 내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하나하나 짚다 보면, 내 무의식 혹은 인식(認識); 그림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고(직접 알 수 있으면 이미 무의식이 아니지), 상황에 부딪히면서 드러나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유추할 뿐이다. 그렇게 조금씩 알아간다고 생각한다. 예수님 말고 부처님께서도 “깨어있으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내 마음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유심히 지켜보라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드러난 ‘나’를 어떻게 하느냐에서 정신치료와 불교 수행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정신치료와 불교 둘 다 현실에서 잘 사는 것이 목적이지만, 정신치료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받아들이는, ‘현생을 잘 살자’ 쪽이라면, 불교 수행은 그걸 넘어서 남과 부딪히는 부분을 하나씩 다듬어 결국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해탈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나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다. 그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하지만 그게 꼭 글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잘 기억할 수 있다면 글로 적을 필요도 없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림, 누군가에게는 음악. 취미활동, 원데이 클래스, 여행 등등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그 자극들을 자신이 어떤 식으로 이용할 것인가의 문제다. 나의 글 또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자극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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