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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May 30. 2021

<매트릭스> (1999)

알아챌 수도 없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20210530 #매트릭스 #인식 #자유의지


 상상해보자. 내 눈앞의 이 컴퓨터, 책상, 카페, 사람들, 간간이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에스프레소 머신의 커피 가는 소리, 커피 향기,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자판의 감촉, 책상다리한 다리의 저린감, 답답한 마스크의 느낌. 수 미리 초(msec)에서 수 초(sec)의 짧은 시간 동안 머물다 가는 수많은 감각 정보들이 모두 누군가가 내 머리에 집어넣고 있는 전기 자극일 뿐이라면?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심지어 나라는 존재마저도 실재(實在)하지 않고 뇌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면? 우리는 그저 통속의 뇌*처럼 현실이 현실인지 꿈인지도 모른 채 지내는 거라면?

지금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다 진짜가 아니라면?


 주인공인 토마스 앤더슨(이 이름은 스미스 요원밖에 부르지 않지만)은 낮에는 프로그래머로, 밤에는 네오라는 이름의 해커로 지낸다. 나 역시 현실 세계에서는 모 병원의 정신과 전공의이지만, 브런치에서는 ‘초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고, 모 게임에서는 ‘열렙전사’라는 아이디로 놀기도 한다. 또한 현실의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자, 조카, 형/오빠, 동생이며, 누군가의 동료이자 선/후배, 제자이기도 하다. 그때그때 나는 다른 표정, 다른 말투, 다른 태도를 보이겠지. 이렇게 인격 가운데서 외부와 접촉하는 외적 인격을 Jung은 페르소나 Persona**라고 했다. 최근에 눈에 띄는 사람 중에는 김해준과 카페 사장 최준, 동대문 옷가게 사장 쿨제이, 이창호와 재벌 3세 이호창 본부장, 한사랑산악회 이택조, 매드몬스터의 제이호가 있다. 각각 다른 세계관에 있는 존재들이지만, 역할에 맞게 페르소나를 착착 바꾸는 게 신기하고 그 페르소나에 참 잘 녹아든다.

우리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쓴다.


 두 개의 삶을 살아가던 앤더슨/네오에게 어느 날, 유명한 해커인 트리니티가 접촉해오고, 이어서 검은 양복의 사내들에게 쫓기다가 소리도 못 지르고 벌레 기계가 배꼽으로 들어가는 괴랄한 꿈을 꾸는데, 웬걸? 진짜였네? 그리고 찾아 헤매던 모피어스와 마주한다. 현실에 남을 파란약과 진실을 볼 빨간약. ‘이 현실은 뭔가 이상하다’라고 느꼈던 네오는 주저하지 않고 빨간약을 먹는다. 네오는 진짜 현실에서 눈을 뜨고, 검은 하늘과 자신의 몸에 있는 구멍들을 보게 된다. 오히려 꿈같은 현실로 깨어난 네오는 빨간약을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반대로, 매트릭스 안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좋았던 건 언제든 접할 수 있으니 자유로워졌다고 해야 할까? 혹은 깨어난 현실 자체가 또 다른 꿈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고민 없이 빨간약을 고른 네오. 현실에서 눈을 뜨고 후회하지는 않았을지?


 시온, 하늘을 불태워버린 인류의 후손들은 기계와 싸워야 하는 자신들의 운명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늘은 까맣고, 먹을 것도 콧물 같은 죽밖에 없고, 술도 엔진 청소하는 데에 쓸법한 것밖에 없고, 기계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걱정하는 삶. 목 뒤의 구멍이 없어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할까? 아니면 기계에게 재배되지 않고, 매트릭스 안에 갇힌 채로 오감을 빼앗긴 채 삶과 죽음을 반복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길까? 사이퍼는 동료들을, 현실을 버리고 스테이크와 술을, 매트릭스를 택했다. 어쩌면 그가 매트릭스 안에서 왔기에, 이미 달콤함을 맛봐버렸기에 배신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 파란약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Why, oh, why didn’t I take the blue pill?” 너무 많이 알아서 괴로워져 버린 존재, 오감(五感)이 주는 쾌락을 생각하면 사이퍼의 배신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건 아닌 거 같다. 어쩌면 사람들을 매트릭스에서 해방하는 게 무조건 좋은 일만도 아닌 거 같다. 다만 불교의 관점에서, 부처님께서 여러 방편으로 중생들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하는 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따라서 애착, 집착할 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함인데. 스테이크도 누릴 수 있다면 누려야지. 그렇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것은 아니라는 거다.

세상에는 보기/듣기/맡기/맛보기/느끼기 좋은 게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오감(五感)이, 자신이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이 진짜라고 느끼고 살지만, 오감은 속기가 아주 쉽다. 4년 전 짧은 휴가를 틈타 내려간 부산에서 친구를 따라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체험관에 간 적이 있다. 눈을 가리는 VR 헤드셋(HMD)을 쓰고, 콘텐츠에 맞게 컨트롤러를 들고 주어진 임무나 게임을 하는 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친구의 모습이 재밌기도 했지만,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건 ‘VR 롤러코스터’였다. VR 헤드셋을 쓰고 의자에 앉아 안전띠를 매는 것 외에는 하는 게 없었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영상과 피부로 느껴지는 바람, 이리저리 움직이는 의자 덕분에 진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내장이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몇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실제와 거의 비슷했던 게 당시의 나로서는 충격이었고,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게 얼마나 현혹되기 쉬운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했다.

일론 머스크가 한국말로 노래도 부르는 세상인데, 뭐.


 목 뒤에, 몸에 코드를 꽂아서 오감을 주입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들이 하는 ‘생각’은 어떤 걸까? 그들에게 자유의지라는 게 있을까? 생각마저도 주입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매트릭스를 유지하기 위해 기계들은 (재배되는) 사람들에게 각자 특정 역할을 하도록 주입할 수밖에 없었을 거고, 그러면 네오 또한 프로그래머/해커로 활동하도록 정해져 있던 게 아닐까? 모피어스는 네오가 ‘그(The one)’라고 굳게 믿었지만, 오라클의 집에는 다른 ‘그’의 후보들이 있었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길을 제시할 뿐, 빨간약/파란약을 선택하는 것도, 오라클에게 데려가서도 문을 여는 것도 온전히 네오의 몫이었다. ‘그’가 되는 것도 네오의 자유의지였을까?

온전히 자신을 아는 것, 온전한 자신이 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요원들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매트릭스 내에 한할 수밖에 없다. 그물을 찢지 않는 한 그 안에 속할 수밖에 없고, 우주를 벗어나지 않으면 우주의 운명과 함께할 수밖에 없지. 네오는 자신이 ‘그’임을 알았고, 매트릭스도 다 알았고, 그 그물을 찢고 나와 자유자재한 존재가 되었다. 그물 밖의 존재가 그물 안의 존재보다 자유로운 건 당연한 일이지. 중생이 인식의 그물을 하나씩 찢어가면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내 마음이 어디에 매여있는지 잘 들여다보고 하나씩 깨나가야 그만큼 자유로워진다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p.s. 

깨달은 네오가 보는 매트릭스는 초록색 코드들로 가득 차 있다.

 네오는 매트릭스를 다 알게 되어, 매트릭스 내의 모든 것이 다 코드로 보인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도 지수화풍의 인연·연기로 이루어진 가합(假合)의 존재들이다. 네오가 보는 저 코드들이 우리네 세상에서는 인연·연기 혹은 마음이 아닐까? 


21.11.03 내용 추가) 

 매트릭스를 떠나, 세계가 그저 여러 숫자의 나열인 것을 안 것만으로도 실은 대단한 존재이다. 사이퍼도 그의 삶 어느 순간에 세상의 진실을 알기 위해 빨간약을 골랐을 때가 있었겠지. 하지만 매트릭스 속에서 먹는 스테이크가, 금발의 미녀가, 수많은 재산이 다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놓지 못했으니, 그것은 세상의 진실을 알아도 제대로 안 것이 아니다. 세계가 숫자인 것을, 가짜인 것을 진짜로 이해했다면, 그 속에서 스테이크를 먹든 콧물 죽을 먹든, 미녀를 만나든 추녀를 만나든, 돈이 많든 적든 거기에 매이지 않았을 테니까. 어차피 숫자인데 거기에 애착하고 집착한들 무슨 소용이람?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우리 앞에 놓인 컴퓨터, 핸드폰, 책상, 의자, 커피, 컵, 물, 책, 옆에 앉은 사람들, 들리는 소리, 점심 먹고 혀에 남겨진 껄끄러운 느낌, 느껴지는 촉감 다 실재(實在)하지만 잠깐 머물렀다가 변하고 사라지는 것들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게 변한다. 모든 것은 나고 죽고, 더럽고 깨끗하고, 늘고 준다. 따라서 이 세상에 애착, 집착할 것은 없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 ‘통속의 뇌' 주제는 책 『나무』의 「완전한 은둔자」에도, 영화 <소스 코드>(2011)에도 쓰인다.

**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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