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변하는가? 사람에게 ‘변했다’라는 말은 보통 사랑에 있어서 많이 쓰는 것 같다. ‘너 변했어. 전에는 이런 것도 해줬는데...’ 흔히 듣고, 쓰는 표현이다. 보통 연애 초반에는 도파민 때문에 평소에 안 하던 걸 했을 뿐이고, 도파민이 가라앉으면 원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웃기게도 연애가 좀 더 길어지면, 이제는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라는 말로 사람이 변하지 않음을 한탄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겪고 사람이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변하는 존재일까, 아닐까?
"너 변했어"
아직 정신과 의국에 들어오기 전, 선배들에게 습관처럼 묻고 다녔던 질문이 있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데, 치료는 사람이 변하길 기대하면서 하는 것 아니냐?’ 어느 선배는 변하긴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고 했고, 어느 선배는 안 변한다고 하면서, 그 허망함을 술로 달랜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편한 대로 살기에 변하려고 마음먹기도 어렵고, 변하고자 해서 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변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모르는 사람이 나를 바꿀 수 있나? 3년 반의 경험을 담은 내 대답은 ‘아니다’이다. 변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변하고자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 때문에 변하려는 마음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계기는 만들어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마이크 포메로이는 평생 뉴스를 전달하며 산 전설의 앵커이다. 그에게 뉴스는 신성하고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며, ‘뉴스’가 아닌 것은 수준이 낮다고 여긴다. 아침 프로그램은 ‘뉴스’를 전달하지 않으며, 그걸 하면 자신이 쌓아온 명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는 베키가 권하는 모든 것이 다 ‘자신이 할 것이 아니’고, ‘뉴스’만을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본인이 전하기 싫은 뉴스는 술을 잔뜩 마시고 병가를 내서라도 안 하는 고집쟁이다. 그는 질 들뢰즈 Gilles Deleuze의 파라노이아형 인간 paranoia이자,융 Jung의 페르소나 Persona중 한 가지(앵커)만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마이크는 브룩라디 40년산을 얘기하며, ‘자살 직전일 때만 마신다’고 설명하는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페르소나(앵커)를 고집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누구나 가면(persona)을 쓰고 살아간다.
그는 주지사가 횡령과 배임 혐의로 체포되는 장면을 생방송으로 보냄으로써 다시 한번 자신이라고 고집하는 페르소나를 쓴다. 베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페르소나(할아버지, 아버지로서)에서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마이크는 하나의 페르소나(앵커)만을 위해서 달려왔지만, 그거밖에 남지 않아서 그거만 붙잡고 살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런 그가 카메라 앞에서 프리타타를 요리한다. 사람이 변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언제인가? 그를 요리하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 베키였을까? 아니다. 카메라 앞에서 ‘뉴스’가 아닌 요리를 하게 한 건 마이크 자신이다. 베키는 계기를 만들어줬을 뿐이다. 베키를 잃을 것 같은 불안이, 자신이 쌓아온 커리어를 잃는 불안보다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베키가 마이크에게 어떤 의미였기에 마이크가 변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베키는 계속해서 마이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단순히 무언가를 해보자는 제안뿐만 아니라, 답답해서 소리 지르는 것도 포함해서, 어떻게든 마이크를 데리고 프로그램을 이끌어 나가려고 했다. 그랬던 베키가 떠나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이 그녀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아서. 어쩌면 마이크의 마음 깊숙이에서 베키는, 자신이 어떻게 해도 다 받아주는 엄마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 때문에 마이크는 베키를 잡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뭐, 베키가 떠난다고 해도 마이크는 이전의 페르소나를 공고히 하면서 지냈겠지만.
지금의 ‘나’는 아기일 때부터 세상과 부딪히며,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할지에 대한 경험이 축적된 산물이다. 그래서 이전과 다르게 행동/생각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자신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깨는 건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다. 지금의 ‘나’는 세상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할 수 있어서 안정적이지만, ‘내’가 ‘내’가 아닌 게 되어 버리면 예측할 수 없고, 불안해진다. (세상에서) 받아들여질까? 욕먹진 않을까? 이때, 내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있다고 믿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평소에 안 하던 걸 했을 때도 받아들여진다는 믿음.
결국 사람이 변하는 건 스스로의 몫이다. 주변에서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감화(感化)시킬 수도 있겠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 변할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용기는 실은, 미움받을 용기이자 상처받을 용기다. 자신이 그런 모습이라도 괜찮다고, 스스로 허락하는 용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다.
실은 불교의 관점에서는 변하느니 마느니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서양에도 The only constant is change라는 말이 있지만, 불교에서 영원한 것은 해탈뿐이기 때문이다. 해탈 외에는 모든 게 계속해서 변한다. 영원한 것이 없다. 변하기 때문에 중생은 자신의 인식을 깨서 높일 수 있다.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할 수 있는 만큼 인식을 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