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들은 명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곱씹을수록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저마다의 인식대로 받아들인다.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고 인지한 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같은 자극 A가 있다고 해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인다. A', A'' 혹은 B나 Z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매운 음식을 하나도 맵지 않다고 하면서 잘 먹는가 하면, 누구는 조금만 먹어도 땀이 나서 먹기 싫어하기도 한다. 세포 수준에서 생각했을 때, 감각세포에서 나오는 신경전달물질의 양이 각자 다르거나, 아니면 세포의 수용체의 수가 다른가 싶기도 하다. 저마다 즐겁다고 생각하는 게 다르고, 편하고 불편한 부분도 다 다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이다.
같은 사람임에도, 타인을 긍휼히 여겨서 보통 사람은 감히 하지 못할 봉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인배처럼 마음을 좁게 쓰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사람뿐인가? 같은 세상을 사자는 사자의 인식으로, 쥐는 쥐의 인식으로, 새는 새의 인식으로 살아간다. 하나의 세상 같지만 각자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만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같은 걸 보고도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컵에 물이 반 정도 차 있는 것을 보고 어떤 이는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 하는가 하면, “물이 반이나 남았네” 하는 사람이 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보고 어떤 이는 “하느님이 도와주신 거”라고 하고, 어떤 이는 “그럴 인연”이라고 하기도 한다. 다 저마다의 인식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어떠한 인식도 거치지 않고 세상을 볼 수는 없는 걸까? 우리는 중생인 이상 감각기관을 거치지 않고는 세상을 볼 수도, 듣고 맡고 맛보고 느낄 수도 없다. 감각기관을 넘어선, ‘생각’은 또 다른 얘기이다. 위의 예시로 든 물이나 복권의 경우도, 그저 “컵에 물이 반 차 있네”, “복권에 당첨되었구나” 수준을 넘어 생각까지 합쳐진 것이다. 주어진 사실 수준에서 생각을 멈출 수 있다면, 세상을 좀 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에포케(Epoché)를 이렇게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