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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Jan 17. 2022

1. 변기를 뚫으며

내 멋대로 가피(加被)(?) 체험기

#20220112 #변기 #관통기 #가피?


 변기가 막혔다. 그러면 안 되었지만, 보쌈에 같이 온 배추와 고추를 변기에 버린 탓이었다. 잘 내려가라고 손으로 찢어서 넣었는데, 잘 내려가는가 싶더니 막혀버렸다. ‘이를 어쩐다?’ 싶으면서도 내심 괜찮겠거니 싶었다. ‘언젠가는 내려가겠지’ ‘채소니까 물에 곧 썩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고서. 

쌈 싸 먹을 때는 맛있었는데... 

 하루가 지나도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려가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시원하게 내려가는 게 아니라, 물이 차올랐다가 스멀스멀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채소가 차가운 물에 있어서 오히려 신선해지는 건가?’ ‘그럼 뜨거운 물을 부으면 나을까?’ 샤워기로 뜨거운 물을 계속해서 뿌려도 소용이 없었다. 


 시중에 파는 변기 뚫는 약은 단백질을 녹이는 원리이기 때문에 섬유질에는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뚫어뻥, 옷걸이, 페트병 등의 노하우를 알려주고 있었다. 우선 급한 대로 집에 있던 옷걸이를 길게 접어 변기 안을 쑤셔 보았다. 물을 몇 번이고 내렸기 때문에 더럽다는 생각은 (다행히도) 들지 않았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혼났다. ‘관이 괜찮은 걸까?’ 하면서 이리저리 열심히 쑤셨지만 나오는 것은 찢긴 배추 두어 장뿐이었다. 


 다이소에서 뚫어뻥을 사 왔다. 공기의 압력을 이용해서 막힌 것을 밀어내는 원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막힌 부분 뒤쪽에 있는 배추 몇 장을 역류시키는 결과를 냈다. 그래도 조금 위안인 건 날이 갈수록 물이 내려가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는 거다. 




 술 마신 다음 날, 배가 아픈데 집에서 볼일을 볼 수가 없었다. 조금씩 내려가는 걸 믿고 그냥 눌까 하다가, 또 저기에 손을 넣고 물이 이리저리 튈 걸 생각하니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용변은 오피스텔 상가에 가서 해결해야 했다. 막힌 변기를 그냥 내버려 두자니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간의 생활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사람을 부르자니 출장비가 너무 비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다른 방법이 없나 찾던 중에 변기 관통기라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관통기는 말 그대로 변기의 관을 관통(貫通)하는 물건이었다. 단단하지만 휠 수 있는 기다란 쇠 스프링으로 되어있어, 손잡이를 돌리면 스프링이 같이 돌아가는 구조였다. 스프링 끝은 나선 모양이라 손잡이를 돌리면 파고들 수 있게 되어있었다. 모 블로그에 관통기 사용 후기로 ‘막힌 것 같은 부분에 계속해서 돌리니 뚫리더라’,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었다’라는 언급이 있길래 나도 채소는 부술 수 있는 존재니까 그렇게 하리라 마음먹었다. 서툰 솜씨로 하다가 관이 망가져도 어차피 사람을 불러야 하니까, 혼자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정말로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몇 번 해도 뚫리지 않으니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었다. 스프링을 가이드해주는 플라스틱을 넣고 스프링을 밀어 넣은 뒤 손잡이를 돌리는데, 내게 들리는 건 스프링이 관에 닿아 긁히는 기분 나쁜 소리뿐이었다. 제대로 막힌 부분에 걸려서 돌아가는 건지, 아니면 허공에서 돌아가고 있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물을 내릴 때마다 조금씩 물이 빨리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고, 무언가가 되고 있구나 싶었다. 관통기로 하다가 답답할 때면 뚫어뻥으로 몇 번이고 눌렀다. 미처 내려가지 못한 양배추 두어 조각과 고추 꽁다리가 올라와서 주웠다. 

나는 어디를 헤매고 있나...

 노래를 들으면서 적어도 한 곡 동안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돌리리라 마음먹었다. 귀에 거슬리는 쇠 긁는 소리를 들으며 관통기를 돌리자니 오른쪽 허리가 아팠다. 그렇게 하다가 스프링이 들어가는 길이가 옷걸이를 접은 것과 큰 차이가 없기에 그거로 쑤시면서 물을 내렸는데, 어라? 물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거다. 



 이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나름 뭔가를 한답시고 열심히 하지만, 정작 부처님께서 보시기에는 제대로 된 일이 아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그렇게 노력하는 마음이 예뻐서 잘하라고 일도 잘 풀리게 해 주시고, 안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시는 게 아닐까? 그러니 부처님께서 가피를 주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도 나만이 아닌 남을 위한 하루가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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