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 상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 May 09. 2022

<리플리> (1999)

"너와 나는 하나야" "아니야"

#20220509 #영화리플리 #리플리증후군 #정체성


 리플리 증후군의 어원인 영화 「리플리」를 보았다. 미국 소설 「The talented Mr. Ripley」(1955)가 원작으로,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1960)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그게 맷 데이먼 주연의 「리플리」(1999)로 리메이크되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리플리 증후군의 증상은,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하고 자신조차 그 거짓말을 진짜로 믿는다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플리 증후군은 정신질환의 진단 체계인 DSM-5에 없다. 한국에서만 쓰는 단어다. 그리고 영화 「리플리」는 (내가 느끼기에는) 리플리의 거짓말보다 디키를 향한 사랑에 더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디키를 너무나 사랑해서 (말 그대로) 하나가 되고 싶었는데, 그걸 부정당하자 그를 없애고 대신에 디키가 되어버리는 지독한 사랑.


 리플리는 정말로 디키를 ‘사랑’했을까? 그게 ‘사랑’이었을까? 내 생각은 ‘글쎄’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자. 또래들과 함께 있다 보면, 자연스레 나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게 된다. ‘저 친구 참 닮고 싶다’ 하며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나이는 비슷한데 저 친구는 가졌고 나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고민, 나는 누구일까 하는 생각들을 거치며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확고히 하는 과정을 거친다. 때문에 Erikson은 psychosocial development에서 청소년기의 과제가 ‘정체성 정립과 혼란(identity vs confusion)’이라고 했나 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그 과정을 거쳐야 할 때에 입시 준비하느라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나이만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다른 대학과 의대 중에서 의대를 선택했던 것도 정체성과 관련된 여러 고민들을 나중으로 미룰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요는 ‘‘나’라는 사람을 ‘어디까지’라고 생각할 것인가?’가 아닐까? ‘(상대를 닮고 싶다면) 어디까지 닮을 것인가?’ ‘내 한계는 어디지?’ 저 사람과 나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 영화에서 리플리는 디키를 ‘사랑’했다기보다 ‘engulf’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디키 자체를 꿀꺽해서 그가 되고 싶은? [치즈 인 더 트랩]의 손민수가 홍설을 따라 하는 것과 같이 의식적으로 상대를 닮으려는 imitation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일부분을 가져와서 내면화하는 identification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디키 대신에 마지와 사랑에 빠지는 상상(대화)도 하고, 디키와 마지가 배에서 자는 것을 훔쳐보며 괴로워했던 것도 디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라기보다 자신이 디키가 아니라서가 더 맞지 않을까? 그걸 사랑으로 착각하면 동성애가 되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눈에 띈 부분이 세 군데 있었다. 하나는 디키와 프레디가 부스 안에서 같이 노래를 듣고 리플리가 그 모습을 질투하는 장면 바로 다음에 거리에서 남자 둘이 포개어 앉아있는 장면이 나오는 것.

디키와 프레디의 모습이, 바로 다음 장면의 게이 커플과 겹쳐 보인다


또 하나는 기차 안에서 리플리가 디키의 셔츠 냄새를 맡는 장면에서 디키의 옆모습과 리플리의 앞 얼굴이 하나로 보이는 장면.  

입체주의의 그림 같기도 하고... 디키와 하나가 되고픈 리플리의 욕망이 느껴졌다
이미지 출처: https://kor.pngtree.com


다른 하나는 리플리가 도망치면서 피아노 뚜껑을 덮고 안경을 쓰는데, 디키인 척하는 리플리와 리플리 자신이 하나였다가 둘로 분리되면서, 분리된 쪽에 안경이 쓰이면서 리플리가 되는 장면이다.

리플리와 디키가 하나였다가 둘로 분리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바타> (200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