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20220524 #일기 #부럽지가않어
늘 저녁이 애매하다. 점심을 11시 반에 먹으니 일찍 배가 고파지는데 적당하게 먹을 건 없다. 마침 살 거리가 있어서 마트를 갔지만 음식점들은 휴점일이었다. 낙심하던 차에 마트 안에 작은 푸드코트가 보였고, 거기서 저녁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메뉴는 마뜩잖았다. 치즈오븐스파게티는 내 방식대로 치즈를 잔뜩 넣어서 먹는 게 훨씬 맛있고, 양도 많으니 패스. 우동은 별로 안 땡기고... 하는 수 없이 그저 그래 보이는 오므라이스를 선택했다. 가격도 7,500원이나 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밥이 나왔다. 솔직히 7,500원 주고 먹기에는 양도 적고 질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마트 푸드코트에서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되겠지만... (아, 그렇네. 내가 다른 데 갔으면 되었을 것을) 먹을 때는 오히려 별생각 없었는데 글을 쓰는 지금 주린 배를 잡고 다시 떠올리자니 왠지 아깝다. 먹을 때 든 생각은, 토요일에 소고기를 먹으면서 부모님과 했던 대화(“나는 어떤 소고기가 더 맛있는지 모르겠으니 막-입인 거 같다”)나, 부처님께서는 발우공양을 하실 때 발우에 어떤 음식이 들어오든 그냥 드셨겠거니 하는 생각들을 했더랬다. 분명하게 있지만, 분별하지 않음에 관한 생각.
그러다가 장기하의 노래 「부럽지가 않어」가 생각났다.
'너한테 십만 원이 있고 나한테 백만 원이 있으면 너는 내가 부럽겠지만, 세상에는 천만 원을 가진 놈도 있어서 나는 그놈을 부러워하는 거야'
식욕이든 돈이든 명예든 정점이랄 게, 끝이랄 게 있던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채워보지 않으면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다는 걸 모른다. 갖지 못했으면서 생각으로만 ‘신포도’처럼 여긴다면 마음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가져봐야 마음이 한 번은 가라앉는다, 언젠가 다시 일어나겠지만.
십만 원을 갖든, 백만 원을 갖든 끝이 없다. 백억 원이 있으면 좋을까? 좋다기보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돈을 덜 신경 쓰고 살 수 있겠지. 파이어족(FIRE-族;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 될 수도 있겠다. 정당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가져야 한다. 하지만 백억을 가져도 천억 가진 사람을 부러워할 거고 그런 건 끝이 없다. 석유 재벌이라고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사람들은 저마다의 지옥에서 산다니, 그도 분명 힘든 게 있을 테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신포도'겠지만) 결국 가져도 가져도 끝이 없는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삶의 목적으로는 영원히 만족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입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돈은 당연히 필요하다. 직접 사냥해서 먹고 불 피우고, 노숙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돈으로 먹을 걸 사고, 잘 곳을 구하고 하니까. 그렇게 돈은 우리가 좀 더 편하게 먹고 자고 입을 수 있는 수단일 뿐, 더 큰 의미는 없다. 결국 ‘살아있으니까’가 문제다. 안 태어나면 먹을 일도, 입을 일도, 잘 일도 없을 텐데! 하지만 우리는 태어나기 싫어도 태어나야 하고, 아프기 싫어도 아파야 하며, 늙기 싫어도 늙어야 하고, 죽기 싫어도 죽어야 한다. 그게 ‘태어난 자’의 숙명(宿命)이다.
양과 질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 자체가 집착할 것은 아니니, (얕게 받아들이는 수준은, ‘그래도 먹어봐서 여기 오므라이스의 양과 질이 이 정도라는 걸 알았으니까 됐어!’ 정도려나) 남김없이 깨끗하게 다 먹었다. 접시를 반납하고 돌아 나오는데 아차, 내가 밥을 먹은 뒤쪽에 떡볶이와 순대를 파는 분식집이 있었다. 차라리 분식을 먹는 거였는데... 내 시야의 한계였다. 좀 더 둘러보지 않은 내 탓이다, 운명이었겠거니 하고 웃어넘겼다.
p.s. 마트에 버터링 딥초코라는 게 눈에 띄어서, ‘누가 버터링에 초코 바를 생각을 했을까?’ 하며 기특하다 싶었는데, 포장된 걸 보고 화가 났다. 버터링 18개 낱개 포장이라니, 진짜 너무한 거 아닌가? 이건 대기업의 횡포로 볼 수 있다(농담). 오므라이스에서는 잘 넘겼는데 여기서 화가 나버렸다. 나도 참 단순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