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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Mar 09. 2022

6. 이사를 하며

무유공포(無有恐怖)

#20220309 #이사 #밤운전  #무유공포 


 세종시의 집에서 정안 IC까지 가는 길, 그리고 천안-논산 고속도로 일부에는 가로등이 없다. 그래서 해가 지고 난 이후에는 앞차의 빨간 후미등과 차선 너머로 간간이 보이는 노란(때로는 하얀) 전조등을 길잡이 삼아 가야 한다. 신호를 한 번 받고 가기 때문에 보통 무리 지어 가지만, 무리에서 처지거나 앞서게 되면 사이드미러, 백미러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함께, 눈앞의 불빛만을 보며 달리게 된다. 세 번째로 짐을 옮기면서 그런 상황이 생겼고, 문득 무서워져 핸들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공포’라는 단어에서 절에 같이 다니는 D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우리는 어느 카페에서 불교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고, 우리가 여태 쌓아온 것들과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다 내려놓게 하기에 불교가 꽤나 자기 파괴적으로 느껴진다는 얘길 했다. ‘세세생생(世世生生)’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감이 오지도 않지만 윤회를 믿는다면(그렇다고 치면) 지금의 내가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쌓아왔듯이, 전생의 ‘나’도 살아남기 위해 어떤 ‘나’를 쌓았을 것이고, 그게 마음에 남아 윤회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해탈하려면 그런 것들을 더 쌓지 않아야 하고, 여태 쌓아온 것도 다 내려놓아야 한다니. ‘나’라고 생각한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들을 (이번 생을 또 살아야 하니까) 추구하면서도 그 자체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니. 

내가 쌓아온 것들이 나를 이루지만, 그것마저도 애착·집착할 대상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느끼는 불안들이 있다. 발달 단계에 따라 붕괴 불안(disintegration), 피해 불안(persecutory), 대상 상실 및 애정 상실 공포(losing the love or approval of loved object), 거세 불안(castration), 초자아 불안(superego) 등으로 나눈다. 이들 중 붕괴 불안은 ‘자기라는 감각’(sense of self)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불안으로 가장 초기 수준의 불안이다. ‘나’, ‘자기’라는 것은 한 개체가 자신의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쌓아온 그 무엇일진대, 그것을 포기하면 불안해지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삶과 죽음은 형광등이 계속해서 꺼졌다 켜졌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렇기에 그 생에 어떤 역할이 주어지든 그 역할을 할 따름이고, 그 자체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라니. 글을 쓰면서도 어떤 경지인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된다. 선사(禪師)들은 이를 명확히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에도 매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설산동자는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의 다음 구절을 듣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나찰에게 보시하려 했으며, 선종 2조 혜가(慧可)는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게 하려고 자신의 왼팔을 잘랐고, 신라 시대의 이차돈은 불교를 국교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 흔들릴 때마다 불안해지는 게 당연할진대, 살아있는 존재가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초월할 수 있다니, 그 경지가 상상되는가? 


 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D와의 대화에서도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무유공포(無有恐怖)가 그런 경지일까 싶을 뿐이었다. 다만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나? 나는 그저 하루하루 나의 조각조각들을 내려놓을 뿐이다. 상대와 부딪히면서 보이는 나의 면면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만큼 내려놓고, 그게 안 되면 얘기를 꺼내서 타협해야겠지. 시간이 흘러서 나의/상대방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거고. 상대와 부딪히는 건 언제나 괴롭다. 하지만 그것을 넘었을 때 상대와 더 하나가 됨을 느끼고 내 마음도 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만큼 내 마음이 넓어지고 있는 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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