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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Nov 07. 2022

20. 하수구 물이 안 빠져

상근기인 척하기 

#20221107 #하수구 #상근기



 J의 시험 때문에 전주에서 하루 머물게 되었다. 완주에 있는 절에서 가까워서 나는 오히려 좋았다. 시험장 근처에는 모텔밖에 없길래, 에어비앤비에서 시험장 근처 방을 찾아 예약했다. 절에서 나와 숙소로 가는데 먼저 도착한 J가 전화 와서는, 화장실 바닥의 물이 안 빠진다고 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나름 깔끔해 보이길래 바로 예약한 건데?’ 밖은 추운데 이불도 여름 이불이고, 바닥에 머리카락도 떨어져 있고, 냉장고 안도 지저분하다고 J가 자꾸 뭐라고 했다. 화가 났다. 이런 장소를 공유한답시고 내놓다니? 


 도착해서 보니, 그냥 낡은 원룸이었다. 남자 방치고 깔끔한 정도? 나름 꾸민답시고 줄 조명에 무드등에 포스터까지 붙여져 있었다. 나는 ‘집주인이 노력했네’ 싶었는데 J는 단단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바로 나가자고 해서 나갔다. 


 숙소로 돌아와 씻으니 아까 J의 말이 현실이 되었다. 물이 고여서 방으로 넘치진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물이 안 빠졌다. 물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아주 천천히 빠지긴 했지만, 쓰는 데에 지장이 아주 많았다. 고인 물에 담긴 발이 왠지 썩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집주인은 퇴실 시간이 익일 오전 10시이고, 연장하려면 12시까지, 한 시간에 1만 원의 추가 비용이 든다고 했다. 그러니까 12시에 나가려면 2만 원을 더 내야 하는데, 평점 5점을 약속하면 1만 원은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했다. 처음에 그 말을 보고는, 이런 방을 내놓고 평점을 갖고 딜을 하려고 한다는 생각에 괘씸하고 화가 나서, 12시에 나가겠다고만 하고 평점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깟 만 원에 내 영혼을 걸쏘냐? 어디서 우위를 점하려고. 다른 사람들한테 사기 치라는 거 아냐?’ 등등의 여러 생각이 올라왔다. 




 문득 상근기(上根機)는 환경에 순응하는 걸 넘어서, 더 좋게 만든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래, 상근기인 척이라도 해보자.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장소를, 상황을 장엄하게 할 거냐? 어떻게 하는 게 집주인에게도, 이후에 쓸 사람들에게도 이로운 방향인가? 하수구는 가려져 있어 내가 함부로 손댈 수는 없었다. 물 빠지는 것 자체를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이때 J가 현명하게, 괜히 서로 마음 상하게 하지 말고, 그냥 평점 5점 주겠다고 하고 대신에 하수구는 고쳐야 할 거 같다고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가장 옳은 방법인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집주인에게서 1만 원만 달라고, 대신에 평점은 잘 부탁한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5점은 줄 텐데 고쳐야 할 것 같다’라며 사진을 보냈더니 주인이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그냥 쓰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 차례 사건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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