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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Dec 04. 2022

21. 물기를 걷으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20221204 #물기 


 우리 집은 이사하면서 화장실의 욕조를 들어내고 타일을 깔았다. 넘어 다닐 턱이 없으니 샤워하기에는 편한데, 대신에 물이 멀리까지 튄다. 그래서 샤워하고 난 후에는 물 밀대로 바닥과 벽에 고인 물을 쓸어놔야 미끄럽지 않다. 습기도 빨리 가신다. 


 나는 눈이 나쁘다. 근시가 심해서 아주 가까운 게 아니면 초점이 맞지 않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샤워하고 맨눈으로 물을 쓸어낸 뒤 안경을 쓰고 다시 보면,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부분들이 있다. 쓸어냈던 부분도 제대로 안 되어 있을 때도 많다. 덤으로 머리카락도 보인다. 


이게 안경 쓰기 전에 내가 보는 상황이라면
이건 안경을 쓰고 난 뒤의 모습이다. 밑에 물기가 아직 고여있는 것이 보인다.


 문득 마음 닦는 게 이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마음을 들여다본다’, ‘마음의 경계를 찾는다’, ‘수행한다’라고 하지만, 마음을 제대로 보고는 있는 걸까? 안경을 쓰지 않고 샤워실의 물기 닦는 거랑 비슷한 게 아닐까? 애초에 마음을 보는 데에 필요한 ‘안경’이란 게 내게 있기는 한 걸까? 




 근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노력을 안 할 건가? 물기가 고인 것을 조금이라도 쓸어내지 않으면, 습기도 오래갈 것이고 곰팡이도 낄 것이다. 누군가가 미끄러질 수도 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그냥 있는 대로 살게 된다. 마음이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걸리면 걸리는 대로, 턱턱 걸리면서 지내는 거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왕 사는 거, 덜 불편하게, 덜 괴롭게 살고 싶다. 내 마음이 왜 지금 이런지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이렇다. 왜 이 문제가 주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문제는 주어졌고, 나는 이걸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덜 괴롭게 살 수 있다. 끝이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게 만사의 이치이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할 뿐이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지. 두드려라,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장 7절).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도 않는다. 결국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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