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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Jan 26. 2023

삶은 계란

불가지론(不可知論)

#20230126 #삶은계란 #LifeIsEgg


1. 어머니는 계란 삶는 타이머를 9분 40초로 설정해놓으셨다.


1-1. 이 9분 40초는 어디서 알아내신 정보일까? reference가 뭐지? 인터넷의 누군가? 어머니의 경험?


2. 똑같이 9분 40초로 삶는데 결과물이 일정하진 않다. 어떤 때에는 껍질도 잘 벗겨지고, 노른자도 반숙으로 익는데. 또 어떤 때에는 껍질에 흰자가 붙어서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면 겉이 울퉁불퉁해진다. 노른자도 물같이 흘러내릴 때도 있다.


2-1. 계란 찜기를 사드려야 하나? 싶어서 여쭤봤더니, 전에 받은 게 있는데, 잘되지 않아서 그냥 냄비에 삶고 있다고 하셨다.


3. 왜 똑같이 9분 40초로 삶는데 계란마다 결과가 다르지? 9분 40초라는 기준은 찬물부터일까, 끓는 물부터일까? 계란을 삶는 물은 수돗물로 하는 게 일반적이겠지? 세종집(10층)과 경주집(1층)의 고도 차이에 따른 대기압 차이도 한몫하려나? 위도의 차이는? 내륙과 바닷가의 차이는? 삶는 날의 날씨는 영향이 없을까? 같은 코스트코에서 산 계란이어도, 울산에서 산 것과 세종에서 산 것의 차이는 없을까? 닭의 품종마다 계란의 성질도 다르겠지? 계란 하나하나의 차이는? 껍질의 두께, 내용물의 차이는? 계란의 부피 차이는 어떨까? (그냥 계란과 타조알의 조리 시간이 같을 리 없잖나)


4. 애초에 ‘반숙(半熟)’의 정의는 무엇일까? 흰자와 노른자가 어디까지 익은 것을 반숙이라고 할까? 노른자가 촉촉하면 반숙이라면, 어느 만큼 촉촉해야 반숙이지? 계란이 익는 정도는 스펙트럼으로 존재할 텐데,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정의하는 게 맞는 걸까? 내가 바라는 반숙은 어떤 모습인가? ‘이상적인 반숙’이란 흰자의 껍질이 잘 벗겨지고, 노른자는 포슬포슬한 상태가 아닐까?


4-1. 이상적인 반숙에 합당하는 계란은 존재할 수 있는가? 존재한다면, 그게 이상적인 반숙이라는 것은 누가 판단해주는가?

출처: 백종원의 쿠킹로그, 백종원 아저씨는 판단해줄 수 있을지도?


5. 계란 하나 삶는데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이렇게나 많다. 사실, 다 필요 없다. 계란은 그냥 삶으면 된다. 1의 9분 40초라는 시간도, 어머니께서 그냥 여러 번 해보시다가 이 정도면 반숙이구나 하고 경험적으로 아신 것일 수 있다. 그냥 삶아서, 잘 되면 기분이 좋은 것이고, 안 되면 그냥 먹는 거고. 다음에는 더/덜 삶아야겠다 하면서.


5-1. 그러고 보니 계란을 삶는 시간도, 계란마다 이상적인 시간이 있는 것일까? 계란 하나하나마다 egg-alized time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이상적인 반숙의 정의가 스펙트럼이니까 조리 시간 또한 스펙트럼이어야 할까?


6. 이러한 사고의 흐름을 따르다가 나는 포기했다. 그래서 나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어떤 절대적인 진리(眞理) 같은 것에는 끝끝내 닿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 논문 같은 거도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6-1. 하지만 분명 어떤 경향은 있다. 그런 노력들이 부질없는 게 아니다. 진리에 닿을 수는 없어도, 적어도 가까워질 수는 있잖나? 계란을 반숙 정도로 삶으려면 11분도 아니고, 7분도 아니고, 대략 9분 40초 즈음이라는 걸 우리는 알지 않나? 마찬가지로, 여태까지 인간들이 쌓아온 과학적인 연구들은 모두 의미가 있다, 진리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다는 부분에서.


7. 꼭 절대적인 것을 알아야 의미가 있는 것인가? 문득 의국 교수님과 나눈 말씀이 생각났다. ‘무의식에 정답(正答)이 있느냐’는 내 질문에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정답을 알 수는 없겠지만, 아는 내에서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는 거라고 하셨다. 우리의 치료도 정답에 닿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였다. 이런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현재의 정신치료를 만들었겠지. 마찬가지로 현대의 기술들도 이런 식으로 발전했겠거니.


8. 어제도 적었지만, 중요한 건 더 나아지려는 노력이다. ‘이건 어떻게 해도 알 수 없어’, ‘의미가 없어’ 하고 손 놓고 있는 게 아니라 말이다. 내가 자꾸 이렇게 적는 이유는, 나 자신이 무기(無記)에 빠짐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미 이렇게 하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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