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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Jan 03. 2023

난생처음 상사에게 새해 문자를 생략해 보았다

어릴 때부터 크리스마스가 되면 카드를 잔뜩 사서 선생님이며 친구들 나눠주는 걸 좋아했다.

반짝이풀을 떠올리면 지금껏 그 인공꽃 향이 생생히 떠오르며 설레는 이유다.


그땐 그 행위자체가 즐거웠고 어린 내가 연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직장인이 된 지금.


크리스마스 카드는 입사 첫 해에 <1박 2일> 막내 조연출 때 같은 팀 피디 선배들에게 쿠키와 함께 준 게 마지막이다.


당시에도 선배들이 "요즘도 카드를 주냐. 막내가 들어오니 호사를 누려본다"며 엄청 신기해했다. 그중엔 학이 승천하는 카드 모양의 신년 카드로 답장을 준 선배도 있다. 그게 유호진 선배다.




그리고 서른 중반을 넘긴 현재.

2014년에도 신기한 골동품 취급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는 나도 더 이상 구매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카카오톡 메신저가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까지는 열심히도 보냈다.

현재 나의 고과를 주는 상사와 국장님은 물론이고, 나를 거쳐간 상사와, 이전 회사 선배들 등등.


현재 기준으로 약 1700명 정도 되는 나의 카톡 친구 리스트를 내려가며 기계적으로 보내고 답을 받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사회생활의 비결인 냥 신랑한테도 이런 메시지 좀 먼저 보내라고 조언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2022년 마지막 날.

나는 아무에게도 새해인사를 보내지 않았다.


진심이 아닐 바에야, 상투적인 인사를 하지 않아 보기로 한 것이다.

늘 관성적으로 하던 일을 중단할 때는 엄청난 긴장감이 따른다. 그게 별거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도착한 개별 새해인사는 15건 남짓이었다. 매년 수십 건의 카톡을 보내며 살았는데 먼저 나에게 새해 인사를 보내는 사람의 수가 흥미로웠다.


사실 엄청 씁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것보다는 그 15명의 면면을 오히려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보낸 명단을 추려보면,


-가수 매니저 2명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식사조차 해본 적 없는...)

-전 국장님 1명(이분만큼은 내가 먼저 챙겼어야 하는 분인데 아차 싶긴 했다.)

-스타일리스트 1명

-디자이너 1명

-작가 1명


사실 이 중 작가의 메시지가 가장 인상 깊었던 메시지기도 한 게,

내가 첫 입봉을 한 프로그램이 정규화 되면서 한창 바빴을 때 그만둔 작가로서, 내가 가장 힘들 때 힘듦을 얹어준 사람 중 하나라고 은연중 생각했고 피차 마찬가지로 나를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락이 온 것도 뜻밖이지만, 더 뜻밖인 건 본인이 중간에 그만둔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보다 가장 진심으로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구체적인 메시지로 연락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갔을 내용이었다. 아마도 내가 가장 간절했을 때 본인의 안위를 위해 그만둔 매정한 작가 정도로 기억하거나 아마도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났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너무 상대의 입장을 디테일하게 상상하거나 배려하기보다, 나의 얘기를 과감히 먼저 던지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이 작가의 메시지처럼 말이다.


올해 말, 나는 누구에게 새해 인사를 보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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