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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Aug 29. 2022

62세도 레고랜드 좋아합니다

환갑 넘은 엄마의 인생 첫 호캉스(feat. 뚜벅이 여행)

여행 계획은 늘 남편이, 운전도 남편이.


우리 집 공식(?)이다. 내가 면허가 없기 때문이다. 면허도 없지만 계획성은 더 없다. 그래서 늘 남편에게 의지하는(=짐이 되는) 여행을 주로 하며 살았다. 그런 남편이 해외 출장을 갔다. 이번이 갱생의 기회였다. 동행자는 7세 아들과 62세 친정엄마. 목표는 단 하나, '화내지 않기'이다.


뚜벅이 여행의 목적지는 무려, 레.고.랜.드.

새벽 6시 55분 용산에서 춘천행 itx를 타기로 했다. 긴장했는지 새벽 2시가 다되도록 잠이 안 왔다. 거의 못 자고 겨우 일어나 새벽 6시에 엄마가 잘 오고 있는지 확인 전화까지 했다.

"(심드렁) 역으로 걸어가고 있다." 뭔가 너나 잘하라는 한심한 말투였다. 무사히 itx에 탑승했고, 엄마는 처음 타보는데 자리도 넓고 ktx보다 좋다고 했다. 시작이 좋았다.

60짤도 레고랜드 좋아해요

엄마가 햇볕 알레르기가 있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엄마도 레고랜드를 좋아했다. 원래 어지럽다고 아무것도 안타는 분이신데 여기가 유아동이 주대상이라 쉬운 놀이기구가 많아서인지 비행기도 타고, 4D 영화도 "이런 게 3D라는 거구나." 하면서 안경 쓰고 재밌게 보셨다.


"엄마도 비싸서 그렇지 호텔 마사지 좋아해."

춘천에 엄청 좋은 호텔은 없지만, 그래도 안 느껴본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마사지, 조식, 수영장(사우나)이 전부 있는 호텔을 예약했다. 마사지 예약했다고 했을 때 뭘 그런 걸 하냐고 취소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너무 세게 얘기하면 취소하려고 했는데...) 의외로 "엄마 비싸서 그렇지 마사지 좋아해."라고 했다. 실제로도 받고 나서 엄청 좋아하시며 이 코스 그대로 친구들도 데리고 와야겠다고 했다.


엄마, 이런 게 호캉스야

누구나 그렇겠지만 특히 엄마는 안 해본 것에 대해 겁이 엄청 많다. 그런 면에선 아이랑 똑같다. 수영장 저만큼 들어가는데 두 시간은 걸린 것 같다. 깊이 120cm의 풀장이었지만 키판이라도 손에 없으면 무서워서 못 걷는다고 했다. 이럴 땐 내가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한 발씩 걸어봐, 제 자리에서 점프만 해봐." 등. 엄마가 나를 그렇게 키웠듯이 나도 그렇게 했고, 엄마는 뭔가 큰 걸 해냈다는 듯이 연신 브이까지 그리며 좋아했다. 저렇게 자신감을 얻고 나중에 친구들이랑 올 때는 엄마가 대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은지, 내내 전화로 "여기 호텔 한 번 오자. 내가 너네 다 데리고 올게."며 자랑을 하셨다.


어느새 나의 여행 목표는 아이에게 안 해 본 경험을 하게 해 주듯, 엄마에게도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서글프기도 하다. 엄마의 발언권은 거의 없고 내 가이드에 따라만가는 여행이니까. 다행히 즐겁다고 하지만, 언젠가부터 돈을 내가 번다는 이유로 더 이렇게 돼버린 것 같다. 그래서 거의 모든 비용을 내가 내지만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엄마가 사줄게"라고 하면 이제는 일부러라도 받으려고 한다. "엄마가 무슨 돈이 있어." 이런 말도 되도록 안 하려고 한다.


"그래, 엄마가 사. 아들아 할머니가 사준대. 갖고 싶은 거 다 골라~"

그러면 엄마는 엄청 좋아하시며 "그래, 맘껏 골라!"라고 그제야 웃으며 신나 하고, 계산하고 나서는 "그래 봐야 3만 얼마네..." 하면서 민망해하신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당신의 역할이 있다는 걸, 결코 투명인간이 아니라는 걸 주지시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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