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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Jan 31. 2023

반찬 짜다는 말에 욱하지 않는 멘탈

팩트와 나 자신 분리시키기 - 나는 브로콜리가 아니다

워낙 음식을 잘하는 엄마를 두었고, 일찌감치 맞벌이를 시작한 부모님 덕에 주방에 빨리 입성하게 된 터라 음식을 곧 잘하는 편이다. 막 엄청 섬세한 데코나 맛을 표현하는 건 아니지만, 또래에 비해 흉내는 좀 내는 편이고 뭘 하는데 자체에 겁이 없다.

내가 직접 만들었던 음식 사진 모음(언젠가부터 사진을 안 찍게 됐다.)


어렸을 때, 떡꼬치가 맛있다고 하면 엄마가 쇠젓가락에 밀떡도 아닌 쌀떡을 꽂아서(떡꼬치는 밀떡+나무꼬치가 국룰인데...) 튀긴 다음 고추장+물엿+설탕 소스를 발라서 뚝딱 만들어주곤 했었다.


쇠젓가락이라 달궈져서 뜨거울 대로 뜨거운 떡꼬치를 나에게 쥐어주며,

"떡꼬치가 뭐 별거니, 이게 뭐 맛있다고. 먹어봐 봐 파는 거랑 비슷한지."라고 했던 엄마.


시간이 흘러, 나는 식탐이 없는 남편과 아들을 가족으로 만났고

식탐 없는 이들이 가끔 꽂히는 음식만큼은 잘 만들어주고 싶다.


그중 한 때 남편이 꽂혀있던 성수동 콩나물해장국.

사실 나는 사 먹을 만큼의 맛인지는 모르겠고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나름 집에서 육수를 내고 파는 것처럼 오징어도 넣고, 수란도 밥그릇에 만들어서 파는 것처럼 뚝배기에 줬었다. 진짜 파는 거랑 비슷하다며 좋아했던 기억.

남편이 한 때 꽂혀서 만들어본 콩나물 해장국

지금은 다이어트 중이라 음식을 자주 할 일은 없는데, (아 주말에 붕어빵이랑 호떡 만들었구나...)

매일 아침 간단히 남편과 내 도시락을 싸고 있다.


전혀 디테일한 건 아니고,

남편 건 과일을 껍질째 4 등분해서 넣은 과일도시락과 주로 샐러드나 주먹밥인 점심, 저녁 도시락이다.


이걸 싸면서 아침을 같이 차리는데, 오늘은 브로콜리를 데쳐서 소금+참기름+참치액젓+깨에 버무리는 반찬을 시도해 봤다. 예전에 엄마가 이렇게 하면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것보다 훨 낫다고 했던 기억이 나서 대충 해봤다.


분명 브로콜리를 먹고 싶어 했던 남편인데, 뭔가 양이 줄지 않았다.

"브로콜리 왜 안 먹어?"

"아니... 브로콜리가 좀 짜네. 많이 짜네?"


급하게 하느라 소금이 안 녹았는지 엄청 짰나 보다. 그럼에도 도시락 싸느라 정신없는 내 눈치 보느라 말을 못 한 표정이었다.


원래 평소의 나 같았으면 짜다는 말에 화가 엄청났을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종종 대며 만든 내 노력과 시간이 전부 부정되는 느낌이 분노로 표출되는 기분이었달까.

아마 자주 내가 그런 모습을 보였기에 짜도 짜다고 말을 못 했겠지.


근데 오늘은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헉, 짜? 소금이 안 섞였나 보다. 어쩌지."


그러자 브로콜리를 들고 와 물에 헹구더니 "음, 이제 맛있네." 하는 남편.

"나중에 만든 건 안 짤 거야. (미안 미안)."


남에겐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럴 거면 먹지 마!" 하는 분노가 늘 베이스에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브로콜리가 짠 게 왜 내가 화날 일이지 싶다.


팩트는 간이 짜게 된 것이고, 그걸 얘기한건 나를 깎아내린 것도 내 시간과 노력을 부정한 것도 아닌데 예전엔 지레 상상으로 분노하며 부들부들했던 것 같다. 나의 과거지만 참으로 미숙하다.


역으로 나의 과거를 생각하면, 미안한 표정으로 간이 짜다 정도가 아니라 '비리다, 맛없어서 안 먹겠다 등등' 이상한 소리를 해대도 엄마는 "에이씨, 왜 그러지ㅜㅜ"하고 속상해하거나 "유난이다 유난." 딱 이 한 마디하고 금세 다시 만들어주곤 했었는데,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렸던 엄마인데 진짜 어른이었구나 싶다.


비로소 나는 내가 만든 음식에 대한 지적을, 나에 대한 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좀 더 편하게 요리할 자유가 생겼다.

남들에겐 사소할지라도 나에겐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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