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와 나 자신 분리시키기 - 나는 브로콜리가 아니다
워낙 음식을 잘하는 엄마를 두었고, 일찌감치 맞벌이를 시작한 부모님 덕에 주방에 빨리 입성하게 된 터라 음식을 곧 잘하는 편이다. 막 엄청 섬세한 데코나 맛을 표현하는 건 아니지만, 또래에 비해 흉내는 좀 내는 편이고 뭘 하는데 자체에 겁이 없다.
어렸을 때, 떡꼬치가 맛있다고 하면 엄마가 쇠젓가락에 밀떡도 아닌 쌀떡을 꽂아서(떡꼬치는 밀떡+나무꼬치가 국룰인데...) 튀긴 다음 고추장+물엿+설탕 소스를 발라서 뚝딱 만들어주곤 했었다.
쇠젓가락이라 달궈져서 뜨거울 대로 뜨거운 떡꼬치를 나에게 쥐어주며,
"떡꼬치가 뭐 별거니, 이게 뭐 맛있다고. 먹어봐 봐 파는 거랑 비슷한지."라고 했던 엄마.
시간이 흘러, 나는 식탐이 없는 남편과 아들을 가족으로 만났고
식탐 없는 이들이 가끔 꽂히는 음식만큼은 잘 만들어주고 싶다.
그중 한 때 남편이 꽂혀있던 성수동 콩나물해장국.
사실 나는 사 먹을 만큼의 맛인지는 모르겠고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나름 집에서 육수를 내고 파는 것처럼 오징어도 넣고, 수란도 밥그릇에 만들어서 파는 것처럼 뚝배기에 줬었다. 진짜 파는 거랑 비슷하다며 좋아했던 기억.
지금은 다이어트 중이라 음식을 자주 할 일은 없는데, (아 주말에 붕어빵이랑 호떡 만들었구나...)
매일 아침 간단히 남편과 내 도시락을 싸고 있다.
전혀 디테일한 건 아니고,
남편 건 과일을 껍질째 4 등분해서 넣은 과일도시락과 주로 샐러드나 주먹밥인 점심, 저녁 도시락이다.
이걸 싸면서 아침을 같이 차리는데, 오늘은 브로콜리를 데쳐서 소금+참기름+참치액젓+깨에 버무리는 반찬을 시도해 봤다. 예전에 엄마가 이렇게 하면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것보다 훨 낫다고 했던 기억이 나서 대충 해봤다.
분명 브로콜리를 먹고 싶어 했던 남편인데, 뭔가 양이 줄지 않았다.
"브로콜리 왜 안 먹어?"
"아니... 브로콜리가 좀 짜네. 많이 짜네?"
급하게 하느라 소금이 안 녹았는지 엄청 짰나 보다. 그럼에도 도시락 싸느라 정신없는 내 눈치 보느라 말을 못 한 표정이었다.
원래 평소의 나 같았으면 짜다는 말에 화가 엄청났을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종종 대며 만든 내 노력과 시간이 전부 부정되는 느낌이 분노로 표출되는 기분이었달까.
아마 자주 내가 그런 모습을 보였기에 짜도 짜다고 말을 못 했겠지.
근데 오늘은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헉, 짜? 소금이 안 섞였나 보다. 어쩌지."
그러자 브로콜리를 들고 와 물에 헹구더니 "음, 이제 맛있네." 하는 남편.
"나중에 만든 건 안 짤 거야. (미안 미안)."
남에겐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럴 거면 먹지 마!" 하는 분노가 늘 베이스에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브로콜리가 짠 게 왜 내가 화날 일이지 싶다.
팩트는 간이 짜게 된 것이고, 그걸 얘기한건 나를 깎아내린 것도 내 시간과 노력을 부정한 것도 아닌데 예전엔 지레 상상으로 분노하며 부들부들했던 것 같다. 나의 과거지만 참으로 미숙하다.
역으로 나의 과거를 생각하면, 미안한 표정으로 간이 짜다 정도가 아니라 '비리다, 맛없어서 안 먹겠다 등등' 이상한 소리를 해대도 엄마는 "에이씨, 왜 그러지ㅜㅜ"하고 속상해하거나 "유난이다 유난." 딱 이 한 마디하고 금세 다시 만들어주곤 했었는데,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렸던 엄마인데 진짜 어른이었구나 싶다.
비로소 나는 내가 만든 음식에 대한 지적을, 나에 대한 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좀 더 편하게 요리할 자유가 생겼다.
남들에겐 사소할지라도 나에겐 큰 수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