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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Feb 05. 2023

미신을 믿어서라도 지키고픈 존재

난생처음 대보름에 팥밥을 지으며

정월대보름이라고 한다. 사실 깊게 생각해 본 적 조차 없는 날이다.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찰밥이나 나물 등을 해주시면 가끔 얻어먹는 정도였다.


그랬던 내가 결혼한 이후에 처음인 건 물론이고 태어나서 처음 팥 찰밥과 나물을 만들었다.

이유는 단 하나, '가족들에게 먹이고 싶어서'이다.


특히 오곡밥에 들어가는 '팥'이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먹는 것이라는 점이 나의 의지를 불태웠다. 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시어머니께 받아두고도 냉동실에 넣어만 뒀던 팥을 꺼내서 바로 물에 담갔다.


반나절 정도 불리면 좋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고, 한 번 물에 삶고 그 물은 버렸다. 팥에 사포닌 성분이 설사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해서 첫 물은 버리고 다시 물을 받아서 콩과 함께 익을 정도로만 삶아주었다.


그리고 찹쌀과 맵쌀을 2:1로 씻어 불려둔 것에 넣고 섞어서 찰밥모드로 밥을 지었다.

다행히 밥은 성공적. 처음 해본 시래기나물 등도 나쁘지 않았다. (원래 겨우내 묵힌 나물을 먹는 거라고 하는데, 집에 있었던 시금치와 고추 등을 무쳤다.)

아이가 원하는 카레까지 동원되니 좀 두서없는 대보름 밥상

사실 다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식재료인 것에 비해 불리고, 삶고, 다시 밥하고 손 많이 가는 팥밥이지만, 이걸 먹고 가족들에게 닥칠 티끌 같은 불운이라도 떨칠 수 있다면 기꺼이 해주고 싶었다.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나의 엄마와 시어머니는 팥밥과 나물을 매번 하셨던 걸까. 필사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팥밥을 챙기셨던 시어머니가 생각났다.


사실 나나 남편은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줄 모르고 "1. 대보름을 왜 이렇게 챙기냐고 2. 요즘시대에 누가 챙기냐고 3. 우리 가족 다 팥 싫어한다고" 불평을 무려 3절까지 했었는데.


이제 나 역시 나 보다 소중한 가족을 이끄는 일원이 되고 나니, 팥이 맛없고 이런 건 모르겠고 그게 뭐든 가족들의 부정을 막고 행복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고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예전에 미우새에서 노총각 아들을 둔 출연자의 엄마가, 자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냐는 질문에 정말 진지한 얼굴로 "나는 구정물도 기쁘게 먹을 수 있어요. 아들을 위해서라면."이라고 말했던 게 인상 깊었었다.


수능 시험장 앞에 호박엿을 붙이고 추운 줄 모르고 기도하는 모성을 '무식한 미신'이라 감히 비하하고 욕할 수 있을까. 뭐든 가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호박엿 붙이고 기도하는 것쯤이야 오히려 간단하게까지 느껴진다.


미신을 믿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동물적 본능을 느끼게 하는 이들,

이게 가족이고 내리사랑인가 보다.


"아이 진짜, 뭘 이렇게까지 해"라고 엄마, 아빠에게 날 세웠던 지난날이 이제와 부끄럽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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