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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Feb 22. 2023

남편이 김치찜을 먹고 응급실에 갔다

흰 죽을 끓이며 먹어보는 담대한 마음

바쁘다는 핑계로 간단한 도시락 말고는 음식을 거의 안 하다가 오랜만에 시도해 본 등갈비 김치찜.

사실, 지난주 살림남 이천수 팀 합본을 하다가 시아버지가 만드신 등갈비 김치찜을 보고 꽂혀서 꼭 하리라 하고 해 봤다. (피디 치고 미디어의 유혹을 못 이기는 편;)

맛은 성공적이었으나...


김치찜을 먹기 전부터 속이 쓰리다는 남편말이 좀 신경 쓰였지만 하루종일 밥을 안 먹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급하게 차려냈고, 맛있게 먹어줬다.


그러나 잠시 뒤 더 심해진 위통증.

두통이 있자마자 1초 만에 약을 찾는 나와는 달리, 일단 참고 보는 남편이지만 나는 그걸 또 못 보겠어서.


아들을 데리고 심야약국을 찾아 나섰다.

결국 내 고집대로 한 뭉텅이 약을 사다 줬고, 남편은 못 마땅해하며(?) 마지못해 약을 먹었다.


그리곤 본격적으로 더 심해진 위경련.

내가 사다 준 약을 먹고 가속도가 붙은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병원 가야겠다."


남편 입에서 나올 수가 없는 말 중에 하나인데, 오죽 아팠으면 저렇게 말했을까 싶다.

병원에 가자고 해도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있으면 낫는다고 내 몸은 내가 잘 안 다고 지난 10년을 그래왔는데;


11시가 다 된 시간이라 응급실로 가서 접수를 하고 침대에 누워 기다렸다.



다들 그렇겠지만 응급실에 가면 나는 일단 공포심이 굉장히 크게 든다.


갖가지 이유로 아픈 사람들이 계속 침대를 채우고, 파티션 하나 없이 환자들의 상태가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것이 나에겐 굉장한 압박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응급실을 여러 번 드나들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을 것이다.


입이 헐어서 약을 못 삼키는 할머니부터, 배가 아프다며 아빠랑 같이 온 14세 소녀부터, 우리 아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울부짖는 갓난아기까지.

거기에 끙끙 소리 하나 안 내고 예의 바르게 의료진에 인사할 거 다하고 있는 우리 남편까지 너무도 다양하다.


시공간이 멈춘 것 같기도, 너무 빠른 것 같기도 한 응급실에 오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누가 누굴 싫어하고, 누가 누굴 다신 안 볼 거고' 이런 얘기를 듣다가 왔음에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마음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 와중에 남편은 수액을 맞으면서도 나에게 금주할 것을 주야장천 얘기하고,

8세 아들은 12시가 넘은 시간에도 유튜브를 볼 수 있어서인지 졸린 눈을 부릅뜨고 병원 구석에서 휴대폰을 꼭 쥐고 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불린 쌀을 갈아 멀건 흰 죽을 끓이며, 오늘 하루 거짓 없이 담대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대단한 포부가 있어서가 아니라 말을 지어내면서까지 지켜야 할 중요한 일이란 생각보다 이 세상엔 없기 때문이다.


가족의 건강과 안정감.


이 두 가지를 달성하는 것도 굉장히 어렵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눈부신 응급실 형광들을 바라보며 다시금 느꼈다.


이렇게 응급실에 가면 되지도 않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던 내 등짝을 누가 한 대 때리며 잡아 세우고 "야야, 너 잠깐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이 찰나의 생각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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