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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Mar 06. 2023

적어두고 칭찬해서 욕먹던 선배

그 선배는 다이어리에 '몇 월 며칠 누구누구 칭찬하기'이런 것도 적어놓는 사람이야


사람들이 모이면 무조건 욕을 하는 선배가 있었다. 평소 악행이 많은 건지 험담을 하기에 적합 요소들이 많은진 모르겠지만 체감상 어느 식사자리에 가도 그 선배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같았다.


다들 험담거리를 장전하고 있는 것처럼 한 마디 씩 해서, 그 선배와 친분이 없는 나는 껴들만한 틈도 없을 정도였다. 사실 나에게는 고과도 잘 주고 좋은 선배기도 했어서, 아마 멋 모르고 "좋은 분이던데." 이런 말이라도 했다가는 나 역시 2차 험담 리스트에 올라갔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특히 많이 들었던 그 선배의 험담 중 하나는 '칭찬마저 계획해서 한다'라는 것이었다. 언뜻 보면 칭찬 같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욕을 먹는 이유는 이렇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칭찬이 아닌,  불순한 의도에 기반해 치밀하게 다이어리에 기록해 두고 '해 치운 일'에 불과하며 매번 이런 식으로 영혼 없이 도구 대하듯이 사람을 대하는 나쁜 선배라는 것.


그때는 그냥 생각 없이 넘기고 살았는데, 어느덧 나도 한 프로그램의 메인피디가 됐고 많지는 않지만 내 아래에 후배 피디가 있는 구조가 됐다. 물론 각자 사는 게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다. 


첫 연출작인 <주접이 풍년>이란 프로그램을 했을 때는 애정도 애정이지만 나도 미숙한지라 후배 조연출들과 거의 매일 얼굴 보고 의논하고 의지하고 그랬었는데, 여긴 또 장수 프로그램답게 알아서 착착 돌아가는 구조라 그런지 더욱 소원하다.


그러다 보니 칭찬은커녕 대화조차 쉽지 않다. 오히려 "얘기 좀 할까?" 하면 다들 바짝 긴장하고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이 와중에 녹화 때 VCR 플레이가 제대로 된 적이 없었는데 그걸 후배가 몇 주 만에 해결했다. 실제로 후배 덕에 녹화 진행이 너무 수월했어서 꼭 칭찬해 줘야지 했는데 이마저 며칠이 지났다.


차라리 그 선배처럼 "녹화 VCR 개선한 후배 칭찬하기"이런 걸 적어두었으면 사람들로 조롱은 좀 받았을지 몰라도 차라리 나았을까. 


실제로 과정을 떠나 입에서 나오는 게 '칭찬'이라면, 계획적이든 영혼이 없든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역으로 생각해서 내가 하루에 몇 번이나 칭찬을 듣는지 생각해 보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칭찬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값진 일이다.




일례로 요즘 아이가 유독 말이 많아졌는데 외부인한테 이런저런 말을 막 할 때는 실례가 되는 말을 할까 봐 신경이 바짝 쓰일 때가 많다. 그런데 어제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잘라주는 빨간색 머리 아주머니를 빤히 보더니 아이가 한 마디 했다. 


"머리카락 색깔이 멋지네요."라고.


아주머니 보고 괜히 이상한 소리 할까 봐 "쉿 조용히 하고 거울보고 얼음해야지~"라고 말하려던 걸 참았는데 잘 참았다 싶었다. 아주머니도 아이가 어설픈 말과 발음으로 건넨 말이지만 그 말에 한 번이라도 활짝 웃게 되었으니 말이다. 


결론은 나도 오늘은 며칠간 계획해 둔 일이지만 후배를 칭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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