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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Apr 11. 2023

내가 예능 피디라서 좋은 이유

영원한 듣보도, 영원한 스타도 없는 이곳

"티비는 안 본다."

"지상파는 더 안 본다."

"KBS는 더더욱 안 본다."

.

.

.


상담 때문에 마주한 나이 지긋하신 아이 담임 선생님도 "어머니, 어느 방송국 피디세요? 아, 저는 넷플릭스만 봐서요. 호호호"라고 하는 판국이다.

그럼에도, 지상파 예능피디라서 좋은 점(?)이 있다.



AB6IX 웅이가 주고 간 씨디와 포카

벌써 2년 전, 내 입봉작인 <주접이 풍년> 임창정 편에 게스트로 나왔던 AB6IX의 전웅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때 전 제작진에게 정성 돋는 씨디를 주고 갔는데, 사실 미안한 일이지만 그 이후로 씨디를 들어보진 못했다.


직업 특성상 내 이름이 적힌 홍보용 싸인씨디를 많이 받게 되는데, 씨디 플레이어도 요즘 흔하지 않고 찬찬히 들어보기가 사실 어렵다.


그런데 8세가 된 아들이 유독 이 씨디를 어디서 찾았는지 크게 틀어놓고 학습지를 푸는 게 아닌가.

혹시나 해서 다른 출연했던 다른 그룹들 씨디도 가져다줘봤으나 이 씨디가 가장 좋다고 한다. (아이콘, 하이라이트 미안ㅜㅜ)


2년 간 잊고 살았던 앨범이 아이에겐 공부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최고의 명반이었던 것이다.

아이 덕분에 편지도 다시 읽어보고, 넣어놨다던 포카도 꺼내봤다.

공중파 첫 예능이 내 첫프로였다니ㅜ

이제와 편지를 다시금 보니 뭉클하기도 하고, 나 사느라 바빠서 크게 관심을 두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다.

저 친구에겐 공중파 첫 예능 촬영날이었을 텐데, 나에겐 매주 막기에(?) 바빴던 촬영 날 중에서도 100여 명이 넘는 게스트 중 한 명이 웅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덕에 다시 다시금 이 친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이렇게 삶은 누가, 어떤 타이밍에 특정 인물을 보게 되는가에 따라 향방이 굉장히 달라진다.


예능 피디의 경우 더욱 그렇다.

지금은 <살림하는 남자들>이라는 프로그램에 메인 연출을 하는 중이다. 이곳에 와서 기존의 '부부-자녀'로 구성된 고전적 가족 외에 1인 가구나 새로운 유형의 가족 출연자를 넣어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이 없이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는 현진영, 재혼 프로그램에서 인연을 맺은 윤남기&이다은 커플을 새 출연자로 합류시켰고 반응을 보는 중이다.

원래도 관심 있는 인물을 프로그램에서 더 깊이 있게 다뤄볼 수 있다는 게 피디로서의 장점인데,

내가 호감이던 인물이 대중적으로도 관심을 얻고 사랑을 받게 되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다. 그것은 곧 프로그램의 성공이기도 하고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읽었던 책에서 마음에 새겼던 구절.

인간의 생존을 도와주는 것은 각 개인의 인생에 의의가 있다는 자각.


나는 무생물체인 프로그램에 스토리가 있는 사람을 넣음으로써 그 사람의 인생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 자체로 영향을 미치는 일의 선봉에 있다는 것으로 엄청난 자부심과 그만큼 큰 두려움도 느끼고 있다. 내가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의 일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연출하고, 그것이 대중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으로 삶의 엄청난 보람을 느끼고 있다.

감사할 따름이다.


영원한 듣보도, 영원한 스타도 없는 연예계에서

어떤 이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 의미 있을지 고민하는 일.


늘 무겁지만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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