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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May 04. 2023

26년 차 빠순이(?)의<송골매 콘서트> 연출기

방송작가 웹진 <디렉터스 컷>


‘빠순이’는 진행형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이었다. 정확하게 1997년 4월 15일, 젝스키스의 데뷔일이 바로 내가 소위 말하는 ‘빠순이’가 된 날이다. ‘빠순이’는 어린 여성 팬을 비하하는 단어로 실제로 나 또한 극렬히 혐오했던 단어였고, 현재는 다행스럽게 그다지 많이 쓰이는 것 같지 않다. 한창 팬 활동에 열심이던 학창 시절, 2살 터울의 오빠는 내가 이 단어에 열을 올린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랑 싸워서 질 것 같으면 항상 이렇게 놀리듯이 말했다. “빠순이 주제에.” 그럼 난 이 한 마디에 이성을 잃고 맹렬한 기세로 오빠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내가 폭주했던 이유를 이제 와 새삼스레 생각해보니 오빠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나는 내가 빠순이였고, 현재도 변함이 없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런 나보다 30년은 앞서서 대중문화의 매력과 마력을 캐치한 위대한 팬덤이 있으니 바로 록그룹 송골매의 팬들이다. 사실 나를 비롯한 1990년대 이후의 대중가수 팬들은 이분들이 만들어 놓은 팬 문화를 행복하게 누리는 행운을 가진 세대인 것이 사실이다. 모든 것이 부족했을 1980년대에 송골매의 록 음악을 추앙하고 즐기며, 한층 더 자유롭고 선진화된 대중문화를 만들어낸 이들 역시 송골매의 오랜 팬들이다. 나는 이분들보다 많은 걸 알지는 못하지만 26년째 쉬지 않고 누군가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이고, 비교적 다른 예능 PD들보다는 조금 더 깊이 팬을 이해한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송골매, 그리고 팬들의 이야기


이런 마음을 담아 예능 PD로서의 첫 기획을 <팬심자랑대회 - 주접이 풍년>(이하 주접이 풍년)이라는 프로그램으로 했을 정도다. 내 생에 첫 프로그램 <주접이 풍년>은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건 퍽퍽한 삶을 살아가는 데 굉장히 에너지가 되는 일이고, 팬 문화를 즐기는 중장년의 건전한 모습을 보여주자는 의미로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아쉽게도 이 프로그램에서 ‘송골매’에 대해 다루진 못했지만, KBS 대기획 <송골매 콘서트 – 40년 만의 비행>(이하 송골매 콘서트)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 그 무엇보다 40년간 송골매를 그리워했던 ‘팬’들의 진심 어린 이야기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획 의도에 맞춰 게스트 라인업 역시 송골매의 팬을 자처하는 이들로 구성했다. 실제로 <송골매 콘서트>에 출연했던 가수 장기하는 송골매를 가요계 롤 모델로 꼽으며 송골매 키즈이자 팬을 자처하는 사람이었고, EXO(엑소)의 수호 또한 송골매의 히트곡 ‘모두 다 사랑하리’를 리메이크한 후배 가수였다. 이들은 무대 시작 전 리허설 때는 물론 무대가 끝나고 나서도 송골매의 팬들과 같이 객석에 남아 끝까지 송골매의 무대를 온전히 즐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프로그램을 빛내 준 가수 장기하, EXO(엑소) 수호, 성시경, 잔나비, 세븐틴, 스트레이 키즈 등의 가요계 후배들 외에 <송골매 콘서트>에 출연한 유일한 배우 게스트가 바로 이선균이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아득히 먼 곳’이라는 곡을 부른 장면이 인상에 남아 무대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섭외를 진행하다 보니 내가 생각했던 ‘팬덤 코드’와 누구보다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배우 이선균의 큰 누나가 학창 시절 송골매의 열혈 팬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누나가 학창 시절에 방에 송골매 브로마이드를 도배해두고 LP를 사서 모으던 일을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릴 정도였고, 실제로 공연 당일에 멀리 포항에서 일산 킨텍스까지 직접 공연을 관람하러 와주셨다.


    


    

사실 모두가 알다시피 이선균 자체가 워낙 바쁜 배우이기도 하지만 본업이 가수가 아니기 때문에 무대에서 가창하는 부담이 꽤 있었을 텐데도, 송골매 팬인 소중한 누나에게 송골매의 공연과 노래를 선물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섭외에 응하게 됐다고 한다. 그가 중후한 음색으로 무대를 멋지게 채워줄 것이라는 믿음은 제작진 모두 갖고 있었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의외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바로 배우 이선균의 눈물이었다. 배우 이선균은 무대 위에 올라 객석을 채워준 자신의 큰 누나와 비슷한 연배의 송골매 팬들을 마주하고 급작스레 눈시울을 붉혔다.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신보다는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던 본인의 누나 세대의 팬들이 송골매의 무대를 즐기며 아이처럼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송골매 팬덤의 대다수가 문화적인 풍요보다는 고단한 생업의 중심에서 가족들을 위해 일하고 희생했던 세대였다. 즐길 거리도 즐길 여유도 없던 그 시절 시름을 잊게 해준 송골매의 가사 하나하나에 여전히 진심으로 울고 웃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중년 남성팬으로 가득했던 객석


객석을 채운 팬들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중년 남성팬’의 수가 압도적이었다는 점이다. 팬 프로그램인 <주접이 풍년>을 연출하면서 트로트 가수, 아이돌 그룹, 개그맨 등 다양한 분야의 팬들을 만나봤지만 중년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인 팬덤은 잘 보지 못했다. 주로 여성 팬들이 대부분이었고, 1회 게스트였던 송가인의 팬덤 ‘어게인’(Again)이 그래도 중년 남성 팬들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송골매의 팬을 자처하는 이의 상당수가 중년 남성들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사실 공연 시작 전에 중년 남성 팬으로 가득한 객석을 보며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방송 카메라에 담길 객석으로 생각했을 때 중년 남성은 비교적 리액션도 소극적이고 표정 자체도 다채롭지 않은 편이라 방송상 공연 전체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보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오프닝 곡이 시작되고, 객석에 조명이 밝혀짐과 동시에 나의 걱정은 어설픈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인생의 고단함이 그대로 주름이 되어 배긴 얼굴의 중년 남성 팬들은 누구보다 진심 어린 눈빛으로 송골매 노래를 열창하며 뜨겁게 호응했다.
특히 <새가 되어 날으리>를 따라 부르는 모습은 마치 울부짖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주름진 얼굴에서 해맑았던 청춘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이는 것 같아서 공연 당일 중계차에서 편집을 하면서도 볼 때마다 괜스레 마음이 아려왔다. 제삼자인 나조차 이럴 진데 이러한 팬들의 함성과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 받는 배철수, 구창모 선생님 두 분의 감동은 오죽할까 싶었다. 실제로 구창모 선생님은 수십 년 만의 무대에서 바라보는 팬들의 모습에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고, 전혀 녹슬지 않은 가창력의 소유자이심에도 불구하고 혹여나 팬들과의 만남에 너무 흥분해서 음이라도 틀릴까 굉장히 걱정하며 무대에 임하셨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흥분한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 선생님을 보며 나를 사랑해주는 수천 명의 팬들이 나를 뜨거운 가슴과 진심의 눈으로 바라봐주는데 어느 누가 담대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TV 나오는 연예인이 밥 먹여주냐?”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씀이고, 나 역시 어릴 적 빠순이 시절(?)에 부모님으로부터 혼날 때 많이 들었던 말이다. 긴 시간 팬으로 살아보니 어른들 말씀이 일정 부분은 맞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밥을 먹여주진 않는다. 송골매 역시 40년 차 팬들에게 밥을 먹여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퍽퍽하고 고됐던 시대를 살아가는 데 ‘낭만’을 얘기하고 떠올릴 수 있게 해준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 낭만 또한 실질적으로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고된 삶을 이겨낼 분명한 힘을 준다. 우리가 가수를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비 맞은 태양도 목마른 저 달도 내일의 문 앞에 서 있네.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하리.”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의 가사이다. 이 가사를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삶을 마주하는 것과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삶을 마주하는 것은 전혀 판이하게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팬덤과 스타의 존재 이유이며, 그 둘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상호작용의 결괏값이 아닐까. 이 결괏값이 바로 <송골매 콘서트>에서 가장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가치이기도 하다.




원문은 하단 링크 참조

26년 차 빠순이(?)의 <송골매 콘서트> 연출기 (ktrwawebzine.kr)


좋은 기회 주신 방송작가웹진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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