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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May 17. 2023

안 친한 사람의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한다면

『슬픔의 방문』_장일호 에세이


이 책의 저자인 장일호 언니와 나는 전혀 친하지 않다.

2008년 이후로 연락한 적이나 있었나 싶다.


언니와 나는 대학시절 기자 같은 언론사에서 기자 인턴을 하며 알게 되었다. 자기소개 때 언니는 "내 이름은 장호일이 아닌 장일호."라고 했다.

술자리에서 동생 이름은 '이호'라고 했다. 일호, 이호, 삼호의 그 이호.


나는 아직도 저 말이 농담인지 진짜인지 알지 못한다. 그 정도로 사적 친분이 없다.


친분을 더 이어갈 수 없었던 이유는, 스펙 쌓기의 일환으로 달랑 두 달 해봤던 기자 인턴 생활을 하며 '기자는 나와 안 맞다'라는 성급 하고도 고집스러운 판단으로 그야말로 '대에충' 인턴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언니는 나와 같은 대학생 인턴이었지만 모든 아이템과 약자들의 이야기에 진심인 그야말로 '기자'였다. 유일한 쉬는 날인 주말에도 기름 유출 사건이난 태안에 기름을 직접 닦으러 가는 사람이었다.


언니가 어느 날 당시 끝물이던 내 싸이월드 방명록에 비밀글을 남겼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너는 모르겠지만 은지 네가 쓰는 글을 한 자 한 자 필사하고 있고 너의 글 솜씨(?)에 샘이 난다."라는 뜻밖의 내용이었다.


하긴 언니는 생뚱맞게도 내가 술 먹고 부어서 출근한 날에도 괜히 엄청 큰 소리로 "야 편은지! 너 왜 그렇게 예쁘냐?", "진짜 화난다. 너무 예쁘다 너." 이런 대꾸하기도 어려운 농담을 건네곤 했다. 아마도 언니와 가까워지기 힘든 N번째 이유였을지도.


나는 언니의 말을 다 믿지 않았다. 특히 필사하고 있다는 말은 전혀 믿지 않았다.

나는 기사를 올릴 때 오타도 제대로 못 거른 적이 있을 정도로, 그야말로 영혼 없이 대충 글 같지도 않은 글을 쓰며 시간을 축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글을 필사를 한다니 믿을 수 없고 믿기 싫었다.


그런 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페북으로 보았다. 우리 아빠 역시 암으로 아팠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당시 과몰입을 했고, 언니한테 무어라 감히 메시지를 보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도 주고받은 연락은 없었다.


그런 언니의 책을 회사 도서관에서 보았다.

이호도 아닌 장'일호'언니의 책.


흔치 않은 이름이지만 혹시 동명이인인가 싶어서 책날개를 보니 '시사인의 기자'라고 쓰여있었다. 언니가 맞았다.

당시 내 글을 필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글들이라 아껴가며 읽었다.


추천사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애란 작가님의 글이라서 더더욱 반가웠다.

(덕후 기질을 감추지 못하고 언니한테 근 15년 만에 연락해서 김애란 작가랑 친하냐고 주접을 떨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는 여전히 언니와 친하지 않지만 먼발치서 훔쳐보는 애독자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래는 최애 구절 필사


우리 앞에 둘러쳐진 지성과 전문성의 휘장 뒤에는 두려움의  대양이 넘실거리고, 열등감의 강물이 흐른다. 마음속에는 항상 보기 싫은 것들의 목록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렇게 유약했고, 사람들의 반응에 과민했으며(남들에게 오해를 받으면 내 영혼의 일부가 허물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근원적인 열등감, 외로움과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온종일 전문성의 가면 뒤에 숨어 지낸다. 그리고 일터를 떠나서는 다시 술병 뒤로 숨는다

-캐롤라인 냅 <드링킹> 중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기르는 일은 전전긍긍을 동반한다. 그것이 고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약하고 작은 존재인 아니와 함께 살면서 어린 사람과 함께 사는 타인의 기쁨과 보람과 고단함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사랑은 피곤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임을 배웠다.

p.109 <이 글은 우리 집 고양이가 썼습니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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