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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May 22. 2023

우리가 힘든 건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

내가 주인공이 아닌 모든 수동적인 일은 피로하므로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야.'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30여 년 넘게 살아보니 내가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기란 꽤 힘들다.


학창 시절만 생각해 봐도 다수에게 주목받으려면 공부를 잘하거나, 예쁘거나, 운동이라도 빼어나게 잘해야 한다. 


그러나 육아는 내가 공부를 잘하건, 예쁘건, 운동을 잘 하건 상관없이 모든 조건을 무소용의 경지로 만든다. 그저 잘났든 못났든 나는 철저하게 보호의무가 있는 주변인일 뿐이다.


모든 게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게 마땅하다는 의식을 내 주변인 모두가 공유하고 있으므로 엄마인 내가 주인공이 될 여지는 전혀 없다. 




사실 영혼 없이 누군가에게 장단을 맞춰야 하는 건 단 몇 시간이라도 피로를 동반한다. 

잘 보이기 위한 소개팅이 그렇고, 나의 경우 <불후의 명곡> 조연출 때가 굉장히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사실상 스튜디오 프로그램이고, <1박 2일> 같은 야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비하면 업무 및 편집 강도가 모두 낮다고 봐야 함에도 정말 피곤했다.


녹화에서 내가 담당했던 건, 출연자 인터뷰와 무대 오르기 전 모여서 토크 및 장기자랑(?)을 하는 토크 대기실 진행이었다. 말이 진행이지 MC 3인이 진행하는 모습을 앞에서 보고, 때 되면 출연자들을 무대로 올리고 내려오는 사람 받고 뭐 그런 일들이었다. 그런데 워낙 불후 전문가인 작가들이 옆에 상주해 있어서 딱히 내가 할 일도 없었다. 편하기 그지없어야 했을 테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피곤하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자리가 마침 당시 MC였던 문희준 씨랑 눈싸움하기 딱 좋을 정도로 마주 보고 있었다. 출연자 중에서도 유독 눈치 보며 제작진 성향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MC였던 문희준 씨는 내가 어느 타이밍에 웃는지 계속 지켜보는 타입이었다. 


따라서 나도 딴짓(?)을 못하고 내내 그 시선에 집중하다 보니 두통은 기본이고 집에 오면 목에 담까지 왔다. 네 시간 동안 나의 웃음을 주시하는 이가 있다는 건 감사하기도 하지만 굉장히 버거운 일이었다.



녹화는 4시간 이면 종료라도 되지만, 육아는 종료가 없다. 

철저히 을이 되어 맞춰야 하고, 아이의 안전 혹은 생명과 직결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도 없다. 주인공 타령은 사치다. 그러다 보니 늘 피곤하다.


고강도 운동인 크로스핏을 해도 주인공은 나다. 그래서 버틸만하다. 주인공이 되기 위해 비용을 냈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코치진들이 나를 중심으로 케어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만히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아이를 지켜보는 육아보다 의외로 훨씬 덜 힘들고 오히려 에너지를 얻을 때가 많다.


이토록 주인공이 아닌 삶은 피로를 동반한다. 

가끔 전 국민 1인 유튜브 열풍의 이유 중 하나도 이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주인공이 될 기회가 없다시피 한 피로한 삶 속에서 몇 명이 보든 안 보든 그 순간만큼 화면에는 나와 내 목소리만 있기에 온전히 내가 주인공인 시간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이 유독 나에게 유튜브를 얼른 하라고 몇 년째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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