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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Jun 22. 2023

스펙왕이 자랑이 아니라고요?

수치스러웠지만 정확하고 적확했던 폭격의 한 마디

메인 피디로 일하다 보면 FD를 선발하는 면접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 20대 초중반에서 많으면 30대 초반 지원자들이 주를 이루고 대부분 피디 지망생들이다.


나도 피디가 되기 전에 기자, 라디오 조연출, 인제스트룸 직원, 엔터테인먼트 직원 등 관련 업계를 떠돌았었는데 여전히 변한 건 없는 듯하다.


며칠 전에도 면접을 보는데, 한 지원자의 이력서에 빼곡한 경력란이 눈에 띄었다.

줄추가를 해서 끝없이 적어둔 경력보다 의외로 눈이 간 건 '근무 기간'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최대가 3개월로 한 달짜리 기록들도 수두룩했다.


이 이력서를 보는 순간 22살 때 나의 광고대행사 면접날이 떠올랐다.

심지어 추후 공지된 면접일에 일이 있어서 못 보고, 나만 혼자 단독으로 다른 날짜에 봤던 면접.


눈이 내린 다음날이라 꽁꽁 언 학동역을 하이힐을 신고 꾸역꾸역 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절친이 '알파걸'이라고 놀릴 정도로 치열하고 조급하게 살고 있었다.

친구말로는 "은지는 방송국 동아리도 하고, 학점도 관리하고, 과외도 8개 하고, 인턴 기자도 하고, 그 와중에 연애까지 하네. 알파걸이야 알파걸."이라고 나를 놀렸다.


실제로 당시 20대 초반의 나는 누가 그렇게 가르쳐준 이도 없었지만, 하루도 놀면 안 될 것 같았다.

노는 대신 뭔가 이력하나를 남기고 싶었다. 다행히 이러한 조바심덕에 면접을 남들이 한 개 볼 때 열 개 이상씩 보게 되면서 거의 면접의 신(?)이 되어 있었다.


사실 면접의 신이라고 표현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사실상 '순발력 있는 거짓말쟁이'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광고 대행사 면접도 사실상 큰 흥미가 없었지만, 경력상 '광고'하면 뭔가 기획력 있어 보일 것 같아서 지원했고 면접까지 덜컥 보게 된 것뿐이었다.


물론 면접에서 왜 지원했냐는 질문에는 "태초부터 광고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만화 시작 전에 했던 광고를 더 주의 깊게 봤다."라는 말도 안 되는 뻥을 치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중년의 여성이었던 면접관이 나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편은지 씨, 나이에 비해 경력이 굉장히 많은데... 스펙 쇼핑이라도 하시나요? 그리고 이렇게 세 달 일하고 그만두고, 한 달 일하고 그만두고 한 건 전혀 면접에서 플러스 요인이 아니에요. 자랑이 아니에요."


그 간 숱한 뻔뻔한 거짓말(?)에도 지적 한 번 받은 적 없다가 이렇게 면전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들으니 얼굴이 후끈거렸다.

그렇지만 무조건 붙어야겠다는 미친 승부욕에 눈으로 즙을 짜며, '내가 스펙 쇼핑녀가 아닌 이유.'에 대해 또 능숙한 거짓말과 변명을 곁들였다. 나를 이곳에 붙여줘도 금방 그만두지 않을 거라는 어필 또한 열심히 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내 면접관이었던 분은 날 선 말 따윈 애초에 한 적이 없는 것처럼, 첫 출근 날부터 나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봐주셨다.


그리고 두 달 뒤, 나는 광고대행사를 그만두었다.

더 좋은 회사 면접에 붙었기 때문이었다. 면접관 말대로 스펙 쇼핑녀의 정석을 보여주는 행보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 이력서를 쓸 때마다 단기간의 경력은 아예 기록하지 않게 되었다.

그랬더니 진짜 내가 몰입했던 회사의 경력만이 살아남았고 그게 결국 나를 설명하는 길이 되었다.


그분의 말대로 뜨끔해서 포장을 다 벗겨내니

오히려 내가 더 돋보일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가장 원했던 꿈이었던 예능 피디가 될 수 있었다.




면접에서 나를 유일하게 낯 뜨겁게 했던 그분, 성함조차 모르지만 귀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이번 FD 면접에서 그런 귀인이 되지 못했다.


20대 중반의 잔뜩 긴장한 그 지원자한테, "단기간의 경력을 나열해 놓는 건 자랑이 아니다. 마이너스다."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조금 더 내공이 생기면 면접에서 모두를 합격시킬 순 없지만 그런 유의미한 깨달음이라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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