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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Jul 22. 2023

모두가 반대하던 정동남과의 인연

사람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되는 이유

누구나 안 풀리는 시기가 있다.

정동남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5년 전쯤 그날이 나에겐 딱 그런 시기였다.


프로그램을 할 기회도 없고, 소위 말해 ‘나 빼곤 다 잘되는 것 같은’ 피해의식으로 꽉 찬 시기.


그날도 예능국 사무실에서 의욕과 불만이 반비례한 최악의 상태로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개량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명함을 주며, “안녕하세요~ 한 번 써주시면 열심히 잘하겠습니다.”와 같은 신인이나 옛날 매니저가 할 법한 멘트를 건넸다.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목례만 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내 앞에 내려놓은 명함에 눈이 갔다. 파란색 바탕에 ‘한국구조 연합회’와 같은 문구가 쓰여있었다.


정동남 씨였다.

명함을 그냥 들여다보고 있는데, 한 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은지야, 복도에 한복 입고 이상한 사람이 어슬렁(?) 거리며  피디 찾길래 너한테 보냈다. 끊는다.”하며 사실상 떠넘기듯이 전화를 끊었다.

황당해서 일어나서 그 부장님 쪽을 보니 나한테 통보하고 전화를 끊고 정동남 씨를 피해 반대편으로 도망치듯 나가셨다.


‘아, 이제 회사 어른들까지 귀찮은 일은 다 나한테 넘기는구나. 내가 진짜 할 일 없어 보이는구나.’ 하는 회의가 들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모른 채 정동남 선생님이 해맑은 표정으로 다가와,

“트롯매직유랑단 피디님이시죠? 제가 얼마 전에 용두산 엘레제를 불렀는데 그게 100만 뷰가 넘어서... 시청률 올리는데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와 같은 장황한 말씀을 이어갔다. 사실 크게 듣고 싶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리액션으로 듣긴 했다.


들어본 결과 난 섭외권한이 없는 조연출일 뿐이었지만 게스트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당시 프로그램 부장님께 정동남 씨가 다녀갔는데,

게스트로 출연해 보는 건 어떨지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돌아온 답변은 차가웠다.


“은지야, 너 벌써부터 사람을 아무나 그렇게 막 사귀고 그러면 안 된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을 만나도 모자랄 판에 입봉 전부터 그런 자세는 아주 틀린 거야. “라고 하며 괜히 듣지 않아도 될 지적까지 받았다.




그날 밤 집에 와서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나에게 정동남 씨를 떠넘긴 A부장님.

섭외 논의를 드렸다가 생각 없이 아무나 만나는 개념 없는 피디라며 혼낸 B부장님.

그리고 내 감정과 열패감으로 인해 사실상 경청은커녕 예의도 갖추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사실상 일흔이 넘은 나이에 명함을 들고 새파랗게 어린 피디한테 인사하러 직접 다니는 것도 보통일이 아닐 것 같은데,

뒤에서 이런 취급까지 받고 계시다는 생각까지 하니 화가 더 났다.

방법은 없었다.


이렇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남편이 문자라도 드려볼 것을 권했다.

너무 초면이라 내키진 않았지만, 괜히 비 오는 날 저녁에 나 같은 어린 피디 때문에 속상해서 어디서 소주라도 먹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남편의 채근에 문자를 드렸다.


그리고 다음 날인가 전화가 왔던 것 같다.

수 십 년 이렇게 방송국을 다녔는데 문자로까지 마음을 써준 피디는 처음이라고, 본인이 자칭 시청률의 화신(?)이라며 꼭 나에게 도움을 주시겠다고 했다.

민망하고 말씀만으로 감사했다.


그러나 내가 어떤 프로그램을 할만한 처지도 아니었고 시간은 어영부영 흘러갔다.

그러다 이번 살림남에서 이천수 선수가 생존수영을 하는 아이템을 진행하게 되어 문득 5년 전의 정동남 선생님이 떠올랐다.

어차피 기억도 못하실 것 같아서 작가님들이 섭외를 하게 하고 나는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결국은 편감독이 하는 거니 열심히 도와주겠다고 먼저 말씀해 주셨다.

나도 그제야 “저 도와주신다고 하더니 정말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씀드렸고, 실제로 그 회차의 시청률은 5%를 넘었고, 2049 시청률 순위도 역대급으로 상승했다.  

방송 이후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진 않았고, 지금도 구조 활동 때문에 해외에 나가 계실정도로 엄청 바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년 전 피디로서 최악의 시기를 보낼 때, 편 감독이 잘 될 수 있게 진심으로 응원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해 주시던 선생님.


당시에는 그 마저 부담이고 와닿지 않았는데, 그런 에너지들이 모여 지금의 나의 일상의 행복을 가져다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https://youtu.be/B2a3uYysFh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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