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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Aug 12. 2023

예능피디라는 꿈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넌 뭘 잘하느냐는 뼈 아픈 질문

누누이 말하지만 난 초등학교 시절부터 원했던 방송을 만드는 ’예능 피디‘라는 꿈을 이룬 행운아다.

하지만 놀랍게도 거의 매일같이 내가 행운아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잊는 정도가 아니라, 행복에 겨운 눈물대신 분노와 수치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심지어 업무 때문에 누군가를 은근하지만 오래도록 지긋이 저주하기도 한다.


아니, 대체 꿈을 이룬 것에 대한 행복은 온데간데없고 왜 이렇게 된 걸까.


내가 너무나 원했던 삶이지만 이 삶을 지켜내기 위해 수반되는 변수와 의무들이 수없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조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은지 네가 제일 잘하는 것’을 하라고 한다.


나는 뭘 잘하는 가에 대한 고민이 요즘 굉장히 많다.

내가 동력이 떨어지지 않고 쉽게 말해 질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읽고 쓰기’다.

오히려 출연자 미팅이나 편집보다 훨씬 기복 없이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분야다.


그 외에는 손 빠르게 음식 해내기, 사람 관찰하기, 상담해 주기 정도가 있으려나.


그런데 요즘은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호기심이 많은 편임에도 조금은 부대낌을 느낀다.

최근 읽은 책에서 이것에 대한 원인과 목표를 조금은 파악했다.

내 인생의 방향과 목표가 명확하지 않고 인생의 가치관이 흐릿할수록, 또렷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린다.
그 목소리는 무른 나를 예리하게 파고들어 힘들게 하곤 했다. 그때 생각했다. 내가 빈틈이 많고 주관이 없을수록 누군가의 개입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김규림, 이승희, 『일놀놀일』 p.28


원인이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

대애충 언젠간 책도 내고, 내 말이나 행동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강연 등으로 나눠주고 싶지만 정확한 데드라인이나 목표는 없는 상태다.


다만, 월요일 시사/화요일 자막/수요일 시사+회의/목요일 녹화+smr+합본/금요일 종편 <-여기에 틈 나면 출연자/스태프 미팅 등에 허덕이고 있을 뿐이다.

가끔 애정 있는 출연자에 한해 성과가 보일 땐 일시적 보람도 느끼지만, 그 반대일 경우 환멸과 허무를 느끼기도 한다.


이제 우리의 일상은 인내하며 생산하는 것과 소비하는 즐거움으로 나뉘지 않는다. 생산을 하면서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한다. (중략) 생산 과정을 놀이로 만들 수 있을까? 돈을 버는 과정이 나를 나답게 하는 창조의 행위가 될 수 있을까?

박혜윤, 『숲 속의 자본주의자』


생산하면서 즐거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 전 야외 촬영을 나갔었는데, 아직 예능에 대해 전혀 익숙지 않은 출연자들과 함께한 회차라 부담감이 앞섰지만 밝아지는 그들의 표정에 묘한 보람과 편집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한창 몰입해서 조연출 할 때에 느꼈었나 싶었던 희열이었다.


30년 넘게 사전을 만든 작가 안상순은 『우리말 어감사전』(유유)에서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시선의 향방에 있다고 말한다. 자존심의 시선은 ‘나의 밖’을 향하고 있고, 자존감의 시선은 ‘나의 안’을 향하고 있다.

-김규림, 이승희, 『일놀놀일』 p.86


난 늘 나보다 남을 의식한다. 물론 이렇게 공개적으로 글을 쓰는 것도 남을 의식하는 행위다.

안팎으로 약해졌을 땐 이렇게 글을 쓰는 것조차 부정적이라고 여기며, 가만히 있으면 욕먹을 일도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안에서 어떤 것들에 움직이고 무너지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것만을 따라가기에도 에너지가 부족하다.

이제 더 이상 ‘나의 밖’을 향해서만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야만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가 아닌 장기적으로 진정한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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