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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Aug 28. 2023

서른 되면 죽어야 할 줄 알았지

『놀 수 있을 때 놀고 볼 수 있을 때 보고 갈 수 있을 때 가고』윤영미

10대 땐 나에겐 30대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20대에 중, 고등학생 과외를 할 때, “너희는 서른이 되면 어떨 것 같아?”라는 질문을 했을 때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모두 질색팔색하며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우 쌤 서른되면 죽어야죠. 저는 죽을 거예요. 다 늙어서 뭐해요 진짜ㅜㅜ”


죽긴 왜 죽어 그럼 난 곧 죽어야 하냐면서 웃고 넘어갔지만, 그때는 나도 20대 초반이었기에 크게 서른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막연하게 공포와 환상이 있어서, 서른이 되면 거추장스러운 긴 머리도 단발로 자르고 엄청 질 좋은 면바지를 사입은 주요 학군의 극성 엄마가 되어있으리라 상상만 했다.


그러나 서른 중반, 내 머리는 여전히 길고(심지어 탈색해서 금발이고)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고 주요 학군은커녕 한글을 뜨문뜨문 읽는 것에 박수를 치며 신기해하는 성긴 엄마일 뿐이다.



나에겐 어린 시절 명절 예능에서 한복 입고 눈 뒤집으며 세상은 요지경 같은 류의 춤을 추던 윤영미 아나운서의 신간을 주말 새 읽었다.

오십 대가 되니 몸이 아팠다. 노화가 오니 이젠 진짜 노년이 코앞에 다가온 듯 조급하고 성마른 성격으로 변해가는 듯싶었다. 나이가 경륜은 줄 수 있으나 아량을 주진 않는 것 같았다. 예전엔 나이 들면 절로 지혜로워지고 성숙해지는 줄로만 알았으나 나이 듦은 외려 소외로 인한 짜증과 화를 키웠다.

-지금이 화양연화

나이 들면 어련히 이렇게 되겠지 좋아지겠지 그런 건 없을 것 같다.


색소폰 배워 아무 데서나 시키지도 않는데 불기
사진 동호회에서 몇 번 출사 나가 사진전 하기
눈곱, 입가 거품 끼는 거 모르기
웃어주면 좋아한다 착각하기
처치 곤란 감사패 주기
무늬 있는 피케 셔츠 위에 체크무늬 재킷 입기
“결론은 뭐야? “하며 닦달하기

-꼰대란 무엇인가

다른 문구도 많았는데 내가 공감 가는 것만 가져왔다. 색소폰이랑 사진전에서 뜨악하며.ㅋㅋ


나 잘되는 것보다 자식 잘되는 게 참 기쁨이란 거, 엄마들은 다 동감할 게다. 이 기쁜 소식에 은박지 구겨지듯 쪼그라진 내 뒤웅박 팔자가 순식간에 수소 풍선처럼 화라락 펴졌다.

-오늘은 플러스 데이

구겨진 은박지에서 수소 풍선을 떠올린 그 표현에

오랜만에 기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상해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털에 콤플렉스가 있던 룸메이트가 면도를 하다 베인 본인 팔을 보고,

“야 은지야 딸기 자르면 그 단면 알지? 거의 그 수준이야!!”라고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해서 며칠을 그 잔상이 안 가셔서 왜 그런 기가 막힌 비유를 했냐고 친구를 나무랐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를 위로할 때 하는 말들.
“나는 더 했어.” “다 그래.” “잘될 거야.” “힘 내.”

“나는 더 했어.“는 대화 주체를 자기로 옮기려는 말.
“다 그래.”는 슬픔을 보편화시키려는 말.
“잘될 거야.”는 말을 하기 위한 말
“힘 내.”는 힘을 주지 않는 힘없는 말.

-다정한 위로

습관적으로 선배한테 업무 카톡을 하다. “파이팅 하세요!”라고 했다가 나는 그 파이팅 하라는 말이 너무 싫다며 한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그냥 어색한 사이의 마무리 인사 같은 거였는데 그래서 더 싫다고 난리였던 선배. 당시 회사에서 선배 일이 잘 안 풀릴 때였는데 발랄한 이모티콘과 함께 건넨 파이팅 하세요라는 말이 울컥 버튼을 눌렀나 보다.


물론 하루 안에 “내가 너무 급발진해서 미안...”이라는 식의 연락이 왔다. 그 선배가 지금은 여러모로 더 편안해졌길 빽빽한 출근길 지하철에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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