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형 인간의 팀장생활』_권도연 지음
선배의 삶이 꽤 피곤하다는 걸 느낀 건 고대방송국 2년 차 때였다.
06년도 입학 후 1년 간 다이어리에 점심약속이 빈 날이 없을 정도로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았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고대 한문반의 전통과도 같았다.
“새내기가 어딜 자기돈으로 점심을 먹냐.”는 선배들의 뚝심 있는 점심 공세로 스케쥴러를 거의 검사받다시피 해서 밥 약속이 없는 후배들을 존재하지 않게 하겠다는 선배들 밑에서 새내기 시절을 보냈다.
그래봐야 나보다 한 살 위인 05학번 선배들이었다.
나처럼 과외해서 용돈 쓰는 그런 선배들. 고작 나보다 1년 선배들인데도 미안한 마음에 싼 거라도 고르면 “은지야 왜 이래~ ‘캘리포니아 스시’정도는 골라야지!”하며 윽박 아닌 윽박지르는 선배들과 매일을 함께했다.
가끔 미안한 티라도 내면, 선배들은 정신교육이라도 받은 듯이 “우리도 선배들한테 더 많이 받았으니 너도 후배들한테 내리사랑을 베풀라”라고 했다.
그러다 고대방송국에 들어가게 되었고, 드디어 나도 2학년 선배가 됐다.
여기도 그런 문화가 건재했다.
선배가 후배의 모든 식사와 간식을 해결해 주는 그런 문화.
문제는 방송제 합숙기간이었다. 저녁을 먹고 꼭 치킨이나 야식을 시켜 먹었는데, 그건 모두 조장인 내 몫이었다.
당시 나는 과외비로 용돈을 충당했는데 과외를 꽤 여러 개 했음에도 합숙 기간에만 매일 십만 원 이상 지출로 매달 최소 6,70만 원 정도가 그냥 빠져나갔다.
나로선 두 명 분의 과외비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정도의 금액이었기에 사실 예뻐하는 후배들이었음에도 유쾌하지 않았고,
얻어먹을 때는 몰랐던 선배로서의 무게를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몇 십만 원어치를 사주면서도, 혹시라도 내 불편함이 티 나지 않도록 애써 밝은 얼굴로 얼마든지 더 시키라고 나도 선배들한테 이것보다 더 많이 받았다고 반복해서 말해야 했다. 물론 사실이었다.
선배들이 1년 내내 강조한 내리사랑은 나에게 그리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내리사랑을 느끼기 전에 훅훅 줄어가는 잔고를 보며 공포와 스트레스를 느꼈고, 전혀 죄책감(?) 없이 나의 과외비를 먹어치우는 후배들의 입이 못내 야속하기도 했다.
나는 선배가 될 재목이 아니라는 직감이 왔다.
그리고 나는 그 직감을 느낀 고대 방송국에서 예능 피디의 꿈을 치열하게 무럭무럭 키워 지금 10년 차 메인피디가 되었다.
조연출일 때는 메인피디가 너무 되고 싶었다.
조연출 시절에는 편집도 내 선택권 없이 선배가 정해주는 부분(*그걸 편집 분장이라고 한다.)만 해야 하고, 편집 스타일마저 선배 혹은 메인작가의 취향에 맞춰서 해가야 하는 게 게 피로하기도 하고 자존심 상하기도 했다.
이 모든 걸 이겨내고 며칠밤 고민해 어떻게든 재밌어 보이게 편집하고 자막을 얹어가고, 마음 졸이며 시사에 가져갔는데 아무도 웃지 않거나 “그냥 루즈한데 들어내시죠.”하는 말을 들으면 이 세상의 모두를 저주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상했다.
반대로 열심히 해간 만큼 그 누구도 아닌 메인 선배가 엄청 웃어주며 ’믿고 보는 편집‘이라는 말이라도 해주면 밤을 새도 마음이 콩닥거리고 설렜다. 이렇게 누군가의 평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나약한 조연출의 삶이 때로는 지겨웠다. 그래서 메인피디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 싶다던 메인피디가 된 지금, 대학교 2학년 때 선배로서 느꼈던 스트레스를 종종 느낀다. 아니 더 많이 느낀다.
나보다 남이, 내 선택보단 남의 평판에 더 흔들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선배(메인) 자리에 적합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한다.
가볍게 읽었던 『I형 인간의 팀장생활』라는 책에서도 픽션 형태지만 내가 했던 고민들이 담겨있었다.
팀원일 때는 단순했거든, 시키는 일만 하고, 팀장한테 잘 보이고, 인정받으면 되는 거였어. 근데 팀장이 되니까 복잡해졌어. 상사는 물론 후배도 신경 쓰고, 내 일을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후배 일도 생각해야 하고, 어디 그뿐이야? 팀 전체의 연간 계획, 월간 계획, 주간 계획, 타 팀과의 협조도 생각하고 해결해야 해. (중략)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여. 해결한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문제가 터지고, 하루 무사히 지나가면 또 그다음 날이 문제고, 그걸 일일이 서 팀장에게 물어서 해결하기에는 이제 쪽팔리니까. 그래서, 그래서, 좀 그래.
-p.291 정글에서 초식동물로 살아남기 중
<1박 2일> 막내 때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나를 옆에 앉혀놓고 편집부터 모든 걸 하나하나 알려주던, 지금은 <홍김동전>을 연출하는 박인석 선배가 했던 말이 있었다.
“메인피디가 되면 회의 자리 맨 끝자리에 앉은 막내 작가 표정 하나에도 엄청 신경이 쓰인다.”라고,
조연출 때 그 말을 들을 땐 그건 선배가 섬세한 감성을 가진 메인피디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선배보단 여러모로 훨씬 우둔하니까 내가 메인이 되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자만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메인피디가 되어 겪어보니 그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선배가 유독 많이 생각났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