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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Sep 09. 2022

차은우 보고 정신 차린 이야기

누구나 그런 날이 있다. 하루 종일 전학 온 첫날 같은 날.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앞서서 혼자 눈치 보게 되는 총체적 부적응의 날. 내가 차은우를 만나게 된 날이 딱 그런 날이었다. 한동안 내 전부였던 프로그램이 정신없이 막을 내렸고, 정든 내 사람들을 떠나 낯선 부서로 옮긴 첫 업무 날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선배가 배려를 해주셔서, 낯선이들 사이를 우당당탕 뛰어다니는 업무 대신 MC 담당을 시켜주셨다. 이 날의 MC 중 한 명이 차은우였다.


친분도 전혀 없었고,    <해피투게더> 조연출   그대로 '눈으로  '    있었다. 모든  낯설고 곤란한  하루 종일 함께해야 하는 MC마저 낯선 사람이라니. 극심한 나의 내적 낯가림이 들끓는 느낌이었다. 하나 안심했던 점은 안정적인 진행 능력을 갖고 있다는  알고 있었기에 업무적으로  불안함은 없었다. 그냥 나만 이상한 실수  하면 되겠구나 했다. 그렇게 머리가 복잡하고 두피가 타들어   같던 뜨거운 8, 잠실 주경기장 잔디 위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은우: "피디님 안녕하세요:)"

최근 스케줄이 살인적이라고 들었는데 엄청 밝게 먼저 인사를 해왔다. 그것만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몸이 바쁘고 지치면 친절은 고사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사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건 그 사람의 됨됨이나 그릇과 무관하게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 놀랐던 건 대본 리딩 때였다. (*대본 리딩은 대기실에 옹기종기 앉아서 전체 대본을 직접 MC들이 읽어보면서 타이밍, 애드리브 구간 등을 체크하는 일이다.) 이 날은 기상 문제로 기존의 생방송이 녹화방송으로 대체된 날이었다. 혹시나 모르고 있을까 싶어서, "저희 오늘 생방 아니고 녹화로 바뀌었어요."라고 얘기해줬다 그러자, "헉 진짜요? 엄마가 보고 싶다고 꼭 보신 다 그랬는데. 다시 말씀드려야겠다." 하며 아쉬워했다.


신기했다. 이런류의 케이팝 행사는 100번도 더 가봤을 텐데. 충분히 지겨울 법한데도 뭔가 설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 녹화에 들어가서도 비가 오고 난리인 와중에도 "지금 멘트 톤 정도면 괜찮아요?"라고 꼬박꼬박 물으며 집중을 다하는 모습이 뭔가 거리감이 들 정도였다. 조금 오버를 보태자면, '지금 나 모르게 어디서 카메라가 찍고 있는 건가? 나만 모르는 건가?'라는 생각도 잠시 해봤다.


녹화 후반부에 비가 너무 와서 헤어메이크업이 망가질 것 같아서, "일단 우산을 쓰고 있다가, 내가 큐사인을 주면 그때 우산을 바닥으로 던지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을 때도, 뭘 그렇게까지 하냐는 듯이 "에이 괜찮아요~그냥 해볼게요!"라고 비 맞으면서 미소를 유지한 채, 멘트 한 글자 안 틀린 채 클로징까지 마쳤다. 그리곤 "피디님, 너무 고생하셨습니다"하고 역시 처음과 똑같이 웃으며 인사하고 총총 사라졌다. 엄청난 수미쌍관이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쉴 새 없이 바쁜 차은우도 이렇게 열심히 예의 바르게 설렘 갖고 사는데 내가 뭐라고. 나도 이제라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긍정을 꺼내 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어떤 재벌 2세가 깨진 휴대폰 액정을 들고 있는 사진을 어떤 네티즌이 캡처해서, '저 사람도 깨진 액정 쓰는데 내가 뭐라고 폰을 바꾸냐.' 이런 글을 썼던 것 같은데 내가 그날 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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