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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Sep 15. 2022

그래도 핫도그는 너무 서운하잖아요.

《헤어질 결심 각본_정서경, 박찬욱 지음》을 읽다

극장에서 혼자 봤던 영화《헤어질 결심》


큰 기대 없이 봤는데, 영화에 깊이가 없는 라이트 관객인 나로서는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우연히 읽게 된《헤어질 결심 각본》_정서경&박찬욱. 영화 각본을 정독한 건 처음이다. 각본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시험공부하고 나서 첫 장부터 복기하듯 영화 속 장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극 중 재미요소이자 탕웨이의 매력요소 중 하나였던, '어설픈 한국어' 실력. 언뜻 보면 어설프게 들리지만 사실 그 속내용으로 보자면 어떤 한국인의 한국어보다 완벽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아래에 나오는 '마침내 죽을까 봐.'에서 '마침내'와 같은 부분이.  






둘의 관계가 급 진전된 순간의 지문이다. 사실상 '서래 스토커'에 가까운 급진적 짝사랑에 빠진 해준에게는 천국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한 순간이었을지도. 





53. 해준 차 안 - 원자력 발전소 인근 해안 도로(밤)

운전하는 해준, 화가 났다. 아내한테 거짓말을 해서, 안개 때문에 더 빨리 갈 수 없어서.


물론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마음을 잘 표현한 지문 같다. 아내한테 거짓말을 해서 화가 나고 안개 때문에 (서래에게) 더 빨리 갈 수 없어서 '더' 화가 나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감정동요가 있었던, '핫도그' 장면. 원래 각본에는 '삼각김밥과 떡볶이'였나 보다. 각본을 읽는 재미 중 하나가 각본과 실제 영화에서 달라진 점을 찾는 거라고 하던데, 나는 거의 차이점을 못 찾았다. 혹시 찾으신 분들 댓글로 저도 좀 알려주세요:)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서운했던 핫도그 장면의 원 각본


피의자 조사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 스시 도시락을 내어주던 해준. 사실 스시 도시락이었지만 그건 이미 서래에게 모든 걸 다 주고 싶다는 뜻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매일 고급 도시락을 바쳐도 아깝지 않던 서래앞에 툭 놓여진 식은 핫도그. 심지어 먹는 동안 앞에 앉아주지도 않는다. 그걸 보고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처럼 서운해하는 탕웨이의 얼굴에 감정이 동요되었다. 사실 이별의 독한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서래를 향한 '마음이 더 이상, 전혀 없음'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그런 '핫도그'였기 때문이다.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서래 입장에서는 차라리 독한 이별선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다양한 도구들이 있을 텐데, 사실 '슬픔'이란 감정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자 소품인 '핫도그'. 그 '핫도그' 하나로 식어버린 사랑과 그로 인한 상실의 아픔을 보여준 디테일한 연출에 또 한 번 놀랐던 순간이다. 인간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는 멀리 있지 않다.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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