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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핫도그는 너무 서운하잖아요.

《헤어질 결심 각본_정서경, 박찬욱 지음》을 읽다

by 편은지 피디

극장에서 혼자 봤던 영화《헤어질 결심》


큰 기대 없이 봤는데, 영화에 깊이가 없는 라이트 관객인 나로서는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우연히 읽게 된《헤어질 결심 각본》_정서경&박찬욱. 영화 각본을 정독한 건 처음이다. 각본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시험공부하고 나서 첫 장부터 복기하듯 영화 속 장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극 중 재미요소이자 탕웨이의 매력요소 중 하나였던, '어설픈 한국어' 실력. 언뜻 보면 어설프게 들리지만 사실 그 속내용으로 보자면 어떤 한국인의 한국어보다 완벽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아래에 나오는 '마침내 죽을까 봐.'에서 '마침내'와 같은 부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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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관계가 급 진전된 순간의 지문이다. 사실상 '서래 스토커'에 가까운 급진적 짝사랑에 빠진 해준에게는 천국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한 순간이었을지도.





53. 해준 차 안 - 원자력 발전소 인근 해안 도로(밤)

운전하는 해준, 화가 났다. 아내한테 거짓말을 해서, 안개 때문에 더 빨리 갈 수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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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마음을 잘 표현한 지문 같다. 아내한테 거짓말을 해서 화가 나고 안개 때문에 (서래에게) 더 빨리 갈 수 없어서 '더' 화가 나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감정동요가 있었던, '핫도그' 장면. 원래 각본에는 '삼각김밥과 떡볶이'였나 보다. 각본을 읽는 재미 중 하나가 각본과 실제 영화에서 달라진 점을 찾는 거라고 하던데, 나는 거의 차이점을 못 찾았다. 혹시 찾으신 분들 댓글로 저도 좀 알려주세요:)

KakaoTalk_20220909_213742489.jpg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서운했던 핫도그 장면의 원 각본


피의자 조사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 스시 도시락을 내어주던 해준. 사실 스시 도시락이었지만 그건 이미 서래에게 모든 걸 다 주고 싶다는 뜻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매일 고급 도시락을 바쳐도 아깝지 않던 서래앞에 툭 놓여진 식은 핫도그. 심지어 먹는 동안 앞에 앉아주지도 않는다. 그걸 보고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처럼 서운해하는 탕웨이의 얼굴에 감정이 동요되었다. 사실 이별의 독한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서래를 향한 '마음이 더 이상, 전혀 없음'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그런 '핫도그'였기 때문이다.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서래 입장에서는 차라리 독한 이별선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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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다양한 도구들이 있을 텐데, 사실 '슬픔'이란 감정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자 소품인 '핫도그'. 그 '핫도그' 하나로 식어버린 사랑과 그로 인한 상실의 아픔을 보여준 디테일한 연출에 또 한 번 놀랐던 순간이다. 인간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는 멀리 있지 않다.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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