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가 추천해준 양귀자의 《모순》
책 읽기 아까운 계절이다.
바람이 적당히 쌀쌀해서 설렘과 서글픔이 수시로 교차해서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이번 주엔 세 권 정도 책을 읽었다. 독서의 계절이라서가 아니라 사실 책 읽는 것 외에 시간을 보내는 법을 잘 모른다. 책 말고 다른 재미를 찾는 것이 앞으로 내 인생의 꽤 큰 과제기도 하다.
어쨌든 잊고 살았었고, 최애의 추천이 아니었더라면 안 꺼내 들었을 책 양귀자의 《모순》
너무 재밌어서 그날 다 읽어버렸다. 98년도에 쓰인 책인데, 신경숙의 《외딴방》과 헷갈려서 이미 읽었다고 착각했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일단 굉장히 쉽다. 쉬운 책은 남는 게 사실 없을 때가 많은데, 이 책은 읽고 나면 사랑과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것도 A or B의 선택지가 있어서 쉽게 몰입할 수 있는 방식으로. 따라서 호감이 있는 누군가와 같이 읽고 얘기해볼 만한 책이다. 뭔가 KBS 주말 연속극 같은 느낌이랄까. 엄청 쉬우면서도, "걔가 나쁜 놈이야", "아니야, 걔가 더 나빠."라고 쉽게 몰입하고 참견할 만하다. 그러면서 아주 심플하지만 불변의 통찰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다. (아래 필사 참고)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받는 건 금방 익숙해진다. 왜냐면, 누구나 나 자신은 소중하니까, 당연히 내가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라고 부지불식간에 강하게 믿는다. 그런 나에게 생채기를 낸 사람은 부들부들 떨며 용서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다. 반면 내가 남에게 준 상처를 헤아리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길의 끝에 서 있는 진모를 향해 마주 걸어가면서 나는 콧날이 찡해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낯선 곳에서 낯설게 만나는 혈육은 언제라도 늘 안쓰럽게 보이는 법이었다. -p.123
형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감정.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초라한 혈육의 모습 대한 짠한 마음. 그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데, 특히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감정이다. 가끔은 이러한 감정 소모를 물리적으로 피할 수 있는 외동이 바람직한 건가 고민이 든다.
그나저나, 이 책을 추천해준 아이가 제목이 왜 '모순'인가 끝까지 모르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고 깨달았다고 했었는데. 그 이유가 가장 유복한 캐릭터인 이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엄마와 일란성쌍둥이지만 팔자는 180도 달랐던 곱고 고상한 이모.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자신의 엄마가 폭력 남편도 모자라 아들 옥바라지까지 할 동안, 집안 전체를 꽃으로 꾸미며 살았던 이모. 그런 이모는 오히려 맞으며 살더라도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았던 언니가 부러웠다는 말을 남긴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그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치열하게 살진 않지만 여유로운 그만큼 생각할 시간이 긴 삶을 살았을 이모. 생각할 시간이 길어지면 누구나 깊이 침잠하게 되고,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나의 한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홀로 침잠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오히려 중간중간 이모에 대한 묘사가 나올 때 위태롭다고 느꼈다. 어쩌면 이 결말은 애초에 모순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