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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Sep 29. 2022

팬도 아니라면서 허지웅 책을 보는 이유

《버티는 삶에 관하여》_허지웅 지음




허지웅 님이 한창 방송에 자주 나왔을 당시에 출간된 책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 사람에 대한 정확한 호불호는 없지만 확실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있었다. 몇 년 전 신해철 님이 세상을 떴을 때 허지웅 님이 트위터 상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를 향한 수많은 애도글 중에서도 굉장히 직설적이지만 절친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을 이 사람이 했던 것을 우연히 보게 됐다. 특히 그중 ‘형이 정말 짜증 난다’, ‘구박하고 싶다’는 표현들이 잠깐 생각을 멈추게 할 만큼 강하게 뇌리에 남았다.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늘 기복 없이 멋있고 싶고 정돈돼 보이고 싶다. 그런데 아니러니 하게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면 정제된 언어로 그럴싸하게 상황 표현(포장)이 잘 되질 않는다. 나의 경우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때 사실 고상하게 슬픔이 차오르기보다는, 그냥 먼저 가버린 친구가 밉고 불쌍하고 내일이 오는 것이 짜증 나고 그랬다. 나야 뭐 철 모르는 스물넷 대학생이었기에 그랬겠지만, 글을 업으로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에 묘하게 더 울컥했던 것 같다.


그때의 기억이 꽤 강렬해서 이 사람의 무절제한 감정이 가득 담긴 글을 한 번쯤 읽어보고 싶는 생각을 2년 전부터 했었다. 그래서 서점에 갈 때마다 그의 책이 눈에 띄었고 사려고 했는데, 하필 그때마다 꼭 같이 있던 선배들이 이 사람의 맹렬한 안티였다. 이유는 가장 설득이 어려운 강력한 이유인 ‘그냥 싫다’였다. 그런데 굳이 시민논객이 되어 기꺼이 언쟁할 정도로 팬도 아니었고, 이 사람의 글이 왜 기억에 남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그냥 다음에 사지 뭐.' 하며 미뤘던 것이 지금이 되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전 궁금해요."라고 책을 샀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굳이 앞서서 상대의 기분에 맞췄던 것 같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그리고 맞이했던 첫 번째 필사 구간. 이 사람이 이 책을 쓴 이유라고 마음대로 생각해버리게 한 문장이었다.

우리는 모두 상처받으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생이 영화나 연속극이라도 되는 양 타인과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그 상처를 계기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거나, 최소한 보상받으리라 상상한다. 내 상처가 이만큼 크기 때문에 나는 착한 사람이고 오해받고 있고 너희들이 내게 하는 지적은 모두 그르다, 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착각은 결국 응답받지 못한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고시원에서 원생으로 2년을 살고 총무로 2년을 더 산 뒤 주변에 반지하 전세방을 얻어 나왔다. 벌써 3년째인데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 때마다 매번 어색하다. 고시원으로 부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때만큼 살고 있는 공간의 모든 걸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주변 세계를 향한 애정을 조금씩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주변 세계를 향한 애정을 조금씩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내가 어른이라 단언할 순 없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긴장하는 일이 많이 줄고 대신 아무렇지지 않아지거나 오히려 지루해지는 일이 늘어나는 것 같다. '뭐 어떻게든 상관없어.', '궁금하지도 않다.' 이런 말들이 늘어나는 것. 삶의 여유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직은, '어떻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일'이 비율상 조금은 더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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