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애하는 적》_허지웅 지음
딱히 허지웅의 열성 팬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어느새 이 책을 끝으로, 《최소한의 이웃》이라는 신간 외엔 '허지웅'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모든 책을 읽게 됐다. (그럼 이제 팬이 맞는 건가?)
예전에 아이가 열이 나서 새벽에 응급실에 간 적이 있다. 새벽에 병원에서 아픈 사람들을 보다 문득, ‘그렇게 막살더니 벌 받아서 암에 걸린 거야. 쌤통이네.’ 뭐 이런 출처도 기억 안 나는 악플이 떠올랐다. 암 투병 중인 특정인이 싫을 수는 있는데, 그게 벌을 받아서 그런 거라니. 괜히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세상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착한 사람 상 받고 나쁜 사람 벌 받는 권선징악에 기반한 전래동화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좋겠지만 말이다. 특히 암 같은 병은 그렇게 절대적 누군가로부터 벌 받듯이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댓글에 사람들 호응이 꽤 있었던 걸 보면 당시의 사회 구성원들이 꽤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예전에 박지성 선수의 결혼 기사가 났을 때 모 포털사이트 베플이 ‘박지성 선수만큼은 소박하게 순댓국집 딸에게 장가갈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요’였다. 이렇게 대중이 상상에 기반해 확정한 스타의 이미지는 굉장히 공고하고, 이 공고한 이미지를 거스르는 일에 대한 대가는 꽤 매서울 때가 많다. 물론 엔터회사들도 이것들을 역으로 이용해 돈을 벌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피해자는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 하며 이러한 믿음에 균열이 오는 경우 ‘감싸주고 지지해줘야 할 피해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피해자’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설사 흠결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도 얼마든지 인과관계를 만들어내 낙인찍을 수 있다. 나쁜 피해자 착한 피해자를 나누고 순수성을 측정하려는 시도들의 중심에는 의도가 있다. 피해자의 요구나 피해자가 상징하는 것들이 강자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라면, 그런 피해자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든 너무나 손쉽게 나쁜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간과한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자신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내부고발자』중
상대에게 흠결이 전혀 없기를 너무도 당연하게 기대하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절망스럽다. 그 눈빛이 강한 확신에 가득 차 있을 때 더더욱 그렇다.
아마도 사람들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구덩이 안에서 모래를 퍼내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지루하고 의미 없는 반복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조차 마침내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자아를 성취하며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분투하는 사람보다 일상에 침몰된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인다.
-『지금 모래를 퍼내고 계십니까』중
흔히 말하는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 싸우지 않으면 편하다.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 더욱더 편하다. 그러려고 늘 마음먹는데, 눈앞에 상황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말하게 되고 때론 상대도 나도 기분이 상한 채 회의가 끝난다. 아직 에너지가 많이 남아있나 보다. 이마저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