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은지 피디 Sep 30. 2022

팬도 아니라면서 허지웅 책을 보는 이유②

《나의 친애하는 적》_허지웅 지음

딱히 허지웅의 열성 팬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어느새 이 책을 끝으로, 《최소한의 이웃》이라는 신간 외엔 '허지웅'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모든 책을 읽게 됐다. (그럼 이제 팬이 맞는 건가?)


예전에 아이가 열이 나서 새벽에 응급실에 간 적이 있다. 새벽에 병원에서 아픈 사람들을 보다 문득, ‘그렇게 막살더니 벌 받아서 암에 걸린 거야. 쌤통이네.’ 뭐 이런 출처도 기억 안 나는 악플이 떠올랐다. 암 투병 중인 특정인이 싫을 수는 있는데, 그게 벌을 받아서 그런 거라니. 괜히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세상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착한 사람 상 받고 나쁜 사람 벌 받는 권선징악에 기반한 전래동화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좋겠지만 말이다. 특히 암 같은 병은 그렇게 절대적 누군가로부터 벌 받듯이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댓글에 사람들 호응이 꽤 있었던 걸 보면 당시의 사회 구성원들이 꽤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예전에 박지성 선수의 결혼 기사가 났을 때 모 포털사이트 베플이 ‘박지성 선수만큼은 소박하게 순댓국집 딸에게 장가갈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요’였다. 이렇게 대중이 상상에 기반해 확정한 스타의 이미지는 굉장히 공고하고, 이 공고한 이미지를 거스르는 일에 대한 대가는 꽤 매서울 때가 많다. 물론 엔터회사들도 이것들을 역으로 이용해 돈을 벌기도 하지만.


출처 : YES24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피해자는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 하며 이러한 믿음에 균열이 오는 경우 ‘감싸주고 지지해줘야 할 피해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피해자’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설사 흠결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도 얼마든지 인과관계를 만들어내 낙인찍을 수 있다. 나쁜 피해자 착한 피해자를 나누고 순수성을 측정하려는 시도들의 중심에는 의도가 있다. 피해자의 요구나 피해자가 상징하는 것들이 강자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라면, 그런 피해자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든 너무나 손쉽게 나쁜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간과한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자신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내부고발자』중

상대에게 흠결이 전혀 없기를 너무도 당연하게 기대하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절망스럽다. 그 눈빛이 강한 확신에 가득 차 있을 때 더더욱 그렇다.


아마도 사람들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구덩이 안에서 모래를 퍼내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지루하고 의미 없는 반복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조차 마침내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자아를 성취하며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분투하는 사람보다 일상에 침몰된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인다.

-『지금 모래를 퍼내고 계십니까』중

흔히 말하는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 싸우지 않으면 편하다.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 더욱더 편하다. 그러려고 늘 마음먹는데, 눈앞에 상황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말하게 되고 때론 상대도 나도 기분이 상한 채 회의가 끝난다. 아직 에너지가 많이 남아있나 보다. 이마저 감사할 따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팬도 아니라면서 허지웅 책을 보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