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2022년 말로만 듣고 꿈만 꾸던 '메인피디'가 되었다.
한참 조연출일 때 선배들은 늘 "조연출일 때가 좋은 거라고, 넌 아마 메인피디의 고을 모를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얼른 메인이 되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단순하게는 프로그램에서 성과가 나도 메인선배만 빛을 보고, 막내 조연출이었던 나는 그저 그걸 돕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프로그램에 문제가 발생해도 메인선배 혼자 덤탱이(?) 쓴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안 겪어보면 모른다는 선배 말이 백 번 맞았다.
직접 쓴 기획안으로, 동기들보다 늦은 시점에 메인피디가 되었다.
막상 되고 나니 설렘보단 부담과 압박의 연속이었다.
'아... 내가 이렇게 그릇이 작았나. 내공이 없었나...'
새삼스럽게 매일 같이 나에게 실망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중 내 심장을 가장 강하게 압박한 한 마디는
"피디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였다.
지금 봐도 등골이 오싹한 문장이다.
저 말을 꺼내는 이유의 대부분은 불만 혹은 불만에 의한 퇴사 희망이기 때문이다.
[드릴 말씀=너랑 or 네 프로에서 일 못하겠다.] 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처음 저 문장을 들었을 땐 정말 순진하게, 나와 프로그램에 대해 논의할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이유만 다를 뿐 그만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프로그램에 인격이 있는 것도 아닌데 프로그램과 나를 분리하지 못했던 첫 메인피디 시절에는 저 말을 들을 때마다 마치 비참하게 차이는 기분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기억에 날 만큼 비참하게 차여본 적도 없지만, 그 보다 백 배는 자존심 상하고 슬픈 것만 같았다. 애써 알겠다고 하고 보내고 나서 혼자 편집실에서 <주접이 풍년> 나훈아 편 합본을 하며 펑펑 운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FD가 그만둔다고 골방에서 울 일인가싶다.
그땐 그랬다. FD가 그만둔다고 하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심지어 그 FD와 첫 프로도 끝까지 완주했고, 지금도 한 프로그램에서 일하고 있는데!ㅎㅎ
그 땐 꼭 첫 메인 데뷔자리에서 0점짜리 성적표를 공개적으로 받은 듯했다.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 지금도 "피디님 잠시 시간 좀..." 하면 일단 기분이 불쾌하다. 그만둔다는 결론도 뭐 비슷하다.
최근에도 그런 문장들을 종종 듣곤 한다.
좀 친분이 있는 피디가 시간 되냐는 또 저 문장을 사용하길래,
"왜 또 그래요ㅜㅜ 나 그 말하면 너무 무서워요."라고 했더니 오히려 놀라며 진짜 그냥 한 말인데 앞으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할 정도였다.
더 내공이 쌓이면 저런 말들에 아무 감흥도 없어질까.
근데, 오히려 그건 또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오늘도 저 문장을 내뱉지 않고 애써 내 옆에서 묵묵히 일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