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죽을 때까지 하나만 할 수 있다면 나는 '책'을 고를 것 같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책을 읽고 쓰는 게 가장 질리지 않고 내가 기복 없이 평생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나의 본직업은 예능 피디다.
어떤 동료 피디들은 본인이 편집한걸 백 번 돌려봐도 볼 때마다 빵빵 터지거나, 소소한 고칠 점을 무한 반복으로 찾고 깨알같이 고치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이 꽤 많다. 타고난 능력 있는 피디인 것이다.
나는 신입피디 때부터 저게 되지 않았다.
내가 편집한 걸 여러 번 돌려보면 너무 지루하고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하긴 명감독이 만든 영화도 두 번 이상 못 보는 난데, 내가 만든 게 뭐 그리 재밌겠는가.
심지어 무표정으로 녹화를 멍하니 지켜보다 선배나 출연자들의 질타 아닌 질타를 받거나, 신입 시절 성의가 없다는 평을 들을 뻔한 적도 있다.
그런 내가 최근에 내가 연출한 방송본을 넋 놓고 본 게 있는데,
첫 녹화였던 영웅시대 편 클립이다.
첫 입봉작이었기에 간절한 마음에 모든 VCR 촬영에 내가 갔었는데,
"저는 제가 만든 것에 안 웃어요."라고 오만하게 말한 것이 무색하게 임영웅 팬분들의 얘기에 허리를 젖히며 웃고 있는 낯선 나를 발견했다. 오히려 팬들이 더 차분할 지경이라 민망한 마음도 들었다. 피디가 제일 신난 느낌?;;
그래서 더없이 즐거웠나 보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즐거웠던 만큼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보통 일만하는 편집실에서 혼자 울기도 했던 기간이다. 꼭 지독한 짝사랑을 끝낸 것처럼 내가 너무 좋아해서 더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여전히 든다.
우아하게 관조적으로 그리워할 수는 없는, 나에겐 그런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