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 너는 팬덤이지."
대학생 때 케이팝 팬 커뮤니티와 연관된 스타트업에서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나에게 '팬 전문가'가 되어보라고 얘기해 주셨던 부장님이 계시다. 대학생이었고, 출간은 너무나 머나먼 얘기였기에 그냥 웃어넘겼다.
그 이후로 거의 10년이 가까이 흘러 팬 프로그램 <주접이 풍년>을 론칭했을 때도,
"은지야 너는 팬 전문가가 될 거야. 그게 네 브랜드가 되는 거지. 책도 내고." 하면서 독려해 주셨다.
사실 그 때나 지금이나 회사일이 정신없이 돌아가기도 하고, 그저 막연한 얘기라는 생각에 귀담아듣지 않았다. '세상에 날고 기는 팬 전문가가 많은데 내 주제에 무슨.'이라는 생각으로 차단했다.
그럼에도 부장님은 내가 뭘 해도, "이야~ 역시 팬 전문가가 하니까 다르네!" 하면서 치켜세워주셨다.
하물며 청첩장 하나를 만들어도 "역시 다르다"며 전문가가 될 거라고 꾸준히 말해주셨다.
내가 긴 시간 백수일 때도, 밥을 사주시며 넌 예능 피디가 분명히 될 거라고 해주셨듯이 말이다.
그러나 반전으로, 부장님은 의외로 회사에서 유일하게 나를 울린(?) 분이셨다.
<슈퍼스타K>와 관련한 프로모션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자리였는데,
사실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뭘 하든 말로 잘 때워서 보통 칭찬을 받는 편이었기 때문에 전혀 부담 없이 준비했던 발표였다.
UV의 <이태원 프리덤>이라는 곡이 대유행하던 시절이라, 동료 선배와 오전에 이태원 맛집에서 만나 수다인지 발표준비인지 모를 느낌으로 가볍게 준비해 갔고, 결론적으로 된통 깨졌다.
부장님 앞에서는 죽을힘으로 참고 참아 안 울었지만 모두 나간 텅 빈 회의실에서 엄청 울었다.
그때 내 눈물의 의미는 평소 "잘한다, 최고다"만 해주시던 부장님의 차가운 혹평(물론 전부 다 맞는 말이었음)에 대한 서운함과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섞인 눈물이었다.
어딜 가도 혼난 적 없었던 모범생이었던 나에게 그날은 꽤 충격이었고, 그날을 기점으로 꽤 많은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부장님은 만나서 종종 그 얘길 해도, "내가 널 혼냈어? 네가 울었다고?" 하면서 내가 신나게 논거 밖에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신다.
그런 부장님께 우연히 전한 출간소식은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0여 년 전 팬 전문가로 책을 내라고 해주셨던 그분은 이미 한 걸음 나아가 차기작 아이디어까지 주셨다.
전혀 모르는 분야라고 10여 년 전 그랬듯 발을 쑥 빼려 했지만,
"공부하면서 크는 거지!"라고 나의 핑계를 원천 차단하셨다.
그 시절엔 몰랐지만,
나의 참모습과 진가를 앞서서 알아봐 주는 주변인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