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빠는 녹화기사가 될 거냐고 물었다

녹화기사 대신 매주 녹화하는 피디가 되었습니다

by 편은지 피디


phone-booth-2448536_1280.jpg
KakaoTalk_20240725_165634051.jpg
음성 사서함 없인 덕질 못하던 시절

나는 영유아부터 중3 때까지 진짜 꾸준히 공부를 못하고 안 했다.

강요하는 사람도 없었고, 국어 말고는 하기도 싫었다. 덕질하기도 바빴으니까.


그런 불량 초딩 시절, 쉬는 시간이 되면 횡당보도만 건너면 있는 공중전화를 향해서 뛰었다.

음성사서함을 듣기 위해서다. 무작위로 젝키의 스케줄이 음성사서함에 수시로 업데이트 됐기 때문이다.


이걸 알아야 이번주에 내가 어떤 방송을 보고 어떤 라디오를 들어야 하는지,

혹시 내가 직접 갈 수 있는 스케줄도 있는지 체크할 수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들었다.


공중전화 부스에 선채로 스케줄을 날림으로 적으면서 듣고, 혹시 부정이라도 탈까 <스케줄 노트>에 나름 신경 쓴 글씨체로 옮겨 적었다. 그 노트가 아직 우리 집에 남아있다.


이 스케줄을 토대로 바쁜 초등학생의 한 주가 시작됐다.

VHS 테이프로 다른 가수와 섞이지 않게 타이밍을 딱 잡아 젝키 부분만 음악 방송을 녹화하고,

스카치테이프를 붙여서 만든 오디오 공테이프에 젝키가 출연하는 라디오 방송을 녹음했다.


시간이 겹칠 때는 치렁치렁 줄 이어폰을 한쪽만 낀 채 티브이 녹화랑 동시에 녹음을 진행하기도 했다.

가족 외식 때도 아빠가 갈비를 굽는 아빠 맞은 편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라디오 녹음을 하곤 했다.


얼마나 싫고 한심했을까.

아빠는 혀를 차며 "너는 커서 녹화 기사나 해라."라고 했다.


심하게 무언가에 빠지는 사람을 아빠는 '기사'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아빠 눈에는 바쁘게 녹음하고 녹화하는 딸이 '녹화 기사'로 보였나 보다.


그런데 내가 이런 기사짓(?)을 할 수 있게 노란색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와 마이마이와 씨디와 카세트가 한 번에 들어가는 윙고를 사준 것도 아빠다. 그런 정성 덕이었을까. 공부는커녕 미래가 녹화기사로 점쳐지던 한심한 딸은 매주 녹화를 하는 살림남 예능 피디가 되었다.


매주 웃으며 녹화하고 있으니 그다지 안 좋은 결론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아빠는 곁에 없지만, 카세트 사다 주길 잘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덕후가 브랜드에게 | 편은지 - 교보문고 (kyobobook.co.kr)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김미경=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